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후 Apr 13. 2023

한여름의 복숭아같은 사람

WWOOF: 영국 시골농장 여행기 #12


폴린은 한여름의 복숭아처럼 싱그럽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달달하면서도 새콤하고, 말랑말랑하면서도 단단한 복숭아처럼 폴린이라는 사람을 설명하기엔 단어가 부족했다.



프랑스에서  폴린은  자매  막내딸로, 가족 중에서 자신이 제일 독특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폴린은 성인이  이후 여러 나라를 다니곤 했는데, 사실 지금 자기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나는 폴린에게 물었다.


“너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왜 가족에게 말하지 않았어? 다들 걱정할 텐데.”

딱히 이유는 없어. 하지만  얘기해야  필요도 없으니까.


폴린은 낯선 나라에서 홀로 크리스마스나 새해를 보내도 그다지 외롭지 않다고 말했다. 그만큼 독립적이고 강인한 사람이었다. 프랑스 사람이 자유롭다는 말은 어디서 들은 적이 있지만 폴린이 가진 자유로움은 국가나 문화로 만들어진 게 아닌 것 같았다. 그저 타고난 듯했다.



어느 날, 다 함께 부엌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폴린은 작은 과도로 사과를 자른 다음, 사과가 꽂혀진 칼을 그대로 입안에 넣었다. 사과를 다 먹은 폴린은 따뜻하게 데워진 빵에 잼을 발랐다. 이번에는 칼에 묻은 잼을 핥아먹었다. 함께 아침을 먹고 있던 모두가 멍하니 폴린을 쳐다봤다.


“폴린! 위험해!”

나는 폴린에게 말했다. 그러자 폴린은 동그란 눈으로 날 쳐다보며 말했다.


괜찮아. 하나도  위험해.  서커스 훈련도 받았는걸? 이것보다  위험한 것도 해봤어.



폴린의 말에 모두가 웃었다. 당연히 농담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폴린의 화려한 곡예 기술을 두 눈으로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폴린은 거짓말이나 농담 같은 건 관심도 없다는 걸.



어느 날 저녁, 일을 마치고 다 함께 거실에 모여있었다. 그때 폴린의 엄마로부터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폴린은 전화를 받고 표정이 점차 어두워지더니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분명 좋지 않은 소식을 건네받은 듯했다. 폴린이 전화를 받으며 우는 동안 나는 말없이 폴린의 무릎을 쓰다듬었다. 전화를 끊고 폴린은 말했다.


“조금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대.”

폴린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오히려 좋은 일이야. 할머니가 이젠 편안해지셨으니까. 나이도 많이 드셨고, 계속 병원에 있었거든.


폴린은 요리하는 걸 좋아해서 이따금씩 우리에게 키시나 디저트를 만들어주곤 했는데, 그때마다 ‘이 요리는 할머니한테 배웠어’, ‘내가 만든 것보다 할머니가 만든 게 더 맛있어’ 등의 이야기를 하곤 했다. 폴린이라는 사람을 만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지만 그녀가 할머니를 많이 사랑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날, 폴린은 생일을 맞은 나를 위해 파인애플 케이크를 만들었다.


“파인애플을 넣은 케이크는 흔치 않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좋아했어. 할머니가 늘 만들어주셨거든.”


폴린의 말에 나는 갑자기 어릴 적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폴린에게 파인애플 케이크가 있다면, 나에겐 외할머니가 자주 만들어줬던 콩나물 장조림이 있었다.


사람은 언젠가 세상을 떠나지만 언제나 흔적을 남기고 간다. 음식이라던가, 장소라던가.



삶은 누군가에게 기억되어야만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살아있다는 증거는 누군가가 자신을 기억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영원한 삶이 없듯이 영원한 죽음 또한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콩나물 장조림을 먹을 때마다 외할머니를 기억하니까. 오늘 내가 먹은 파인애플 케이크는 폴린과 폴린의 할머니로 영원히 기억되겠지.


시간이 흐르고 폴린이 이곳을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예린과 나는 폴린에게 마지막으로 다 함께 바다를 보러 가자고 했다.



우리는 농장에서 세인트저스트 마을을 지나 Cot Valley에 도착했다. 가파른 절벽에서 바라본 바다는 태양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왠지 산 정상에 있는 것 같은 기분에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야호-!”


한번 입 밖으로 크게 소리를 내니 무엇이든 말하고 싶어졌다. 나는 바다를 향해 소리쳤다.


폴린!  ! 너랑 함께해서 행복했어!” 폴린은 나를 보고 웃더니 똑같이 바다를 향해 소리쳤다.

“지후! 고마워! 나도 행복했어!”



우리는 서로 웃으며 작별의 포옹을 나눴다.

앞으로 다시 만나지 못할지라도 슬프거나 아쉽지는 않았다. 이별의 슬픔보단 만남의 기쁨이 더 강하니까.


그렇게 폴린이 떠나고 예린과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한 두 명씩 떠나간다는 건 이제 우리도 슬슬 떠날 때가 되었다는 걸 의미했다.


집안을 가득 채운 적막함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전 11화 운명의 사랑을 믿는 다니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