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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후 Apr 14. 2023

어떤 마음은 때론 잊어야만 더 반짝인다

WWOOF: 영국 시골농장 여행기 #13


점심을 먹은 후 예린과 나는 들판을 걸었다. 이곳을 떠나는 날이 조금씩 다가오면서 예린은 말없이 그저 가만히 있는 순간이 많아졌다.



그 순간, 예린에게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자신에게 몰려오고 있음을 느낀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잠깐의 공백이 지나가고 예린이 말했다.


이곳을 떠나는  두려워

예린은 하루하루에 충실하고 단순한 일상을 잃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이전의 빠르고 버거웠던 속도에 다시 익숙해질 것이 틀림없다며 이곳에서 깨달은 지혜를 잊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몸과 마음에서 생생하게 느껴지는 새로운 나를 다시 잊어버린다는  두려운 일이다. 그것이 사람과 감정과 추억으로 만들어진 거라면 더욱더. 하지만 새로운 나에서 이전의 나로 돌아간다 한들 그건 잠시 잊는 것일  결코 잃는 것이 아니다.



얼마 전 새끼손톱만큼 작은 새싹을 옮겨 심었다. 얼마나 작고 가늘던지 행여나 새싹이 다칠까 떨리는 마음에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고, 나는 그 새싹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우연히 그 주변을 지나던 중, 나는 다시 그 새싹을 발견했다.


입에서 ‘와!’ 하고 소리가 나올 만큼 새싹은 그새 훌쩍 커있었다. 이파리의 크기도, 줄기의 길이도 이전의 모습과는 확연하게 달라져있었다. 그동안 시원한 물과 따뜻한 햇살을 맞고 있었으니 새싹이 자라는 건 당연했지만 너무나도 신기했다. 그리고 반가웠다.



매일매일 새싹의 모습을 지켜보았다면 이만큼 신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계속 바라보고 있다고 해서 새싹이 빠르게 자라지는 않을 테니까. 어제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해도 그 미묘한 변화를 느끼긴 어려웠을 것이다. (새싹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커다란 거인이 하루종일 지켜보고 있는데!)


어떤 마음은 때로는 잊어야만 더 반짝인다.


무언가를 잊는다는 건 그것이 스스로 생명력을 가지고 자랄 수 있도록 그에 필요한 시간을 주는 것이다. 한번 내 안에 들어온 마음은 조용히 뿌리를 내려 묵묵히 자란다. 잃어버릴까 조바심 낼 필요도, 사라져 버릴까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그저 잠시 잊고 그다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으면 된다.



기억은 희미해지고 감정은 모호해질 무렵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작았던 새싹에서 커다란 나무로 자란 그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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