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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후 Apr 21. 2023

최고의 휴식, 최대의 수면

WWOOF: 영국 시골농장 여행기 #15


농장을 떠나 차로 십여분을 달려 작은 항구 마을에 도착했다. 믹이 사는 곳, 뉴린이다.



우리는 가파른 언덕을 올라 어느 집 앞에 도착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믹이 문을 열고 우리를 맞이했다. 믹의 집은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예뻤다.



노란색과 빨간색 소파가 놓인 거실은 밝고 따뜻한 분위기로 가득했고, 아치형의 창문 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방금 전까지 창문에 금이 가고 먼지가 가득한 집에 있었는데 갑자기 깨끗하고 좋은 집에서 지내려니 왠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믹은 농장 발룬티어로, 매주 화요일마다 농장일을 도와주러 온다. 다큐멘터리 감독인 믹은 영화제에서 수상까지 한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나에겐 180센티미터가 넘는 훤칠한 키에 검정 뿔테 안경을 쓴, 그저 멋진 할아버지였다.



믹과 처음 이야기를 나눈 건 단 둘이 밭을 갈고 있었던 때다. 갑자기 작은 새가 내 곁에 다가왔고, 믹은 나를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로빈이 네가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믹은 새의 이름이 로빈이라며, 사람들 주위를 잘 맴도는 새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영화와 음식, 한국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믹은 언제나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한 주간 어떻게 보냈는지 물을 때면 난 그동안 농장에서 있었던 재미난 일들이나 휴일에 나들이를 갔던 얘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 후로도 믹은 자주 가는 단골술집에 우리를 데려가 함께 맥주를 마시거나, 집에서 다 같이 피시 앤 칩스를 먹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믹은 예린과 나를 마치 손녀처럼 가까이 대했다.


처음 믹의 집에 놀러갔던 날

믹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자신의 손녀를 보러 일주일 간 집을 비울 예정이었고, 우리는 별다른 계획이 없었다. 그런 우리에게 믹은 자신의 집을 흔쾌히 내주었다.


대신 우리에겐 한 가지 임무가 있었다. 바로 믹의 고양이 ‘스포크’를 보살피는 것이었다.


믹과 스포크

믹은 스포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 귀도  들리는 할아버지 고양이니까 귀찮게 하지 않을 거야.

“몇 살인데요?”

열일곱  정도 됐으려나.


집 소개를 마친 믹은 우리에게 열쇠를 건넸다. 우리는 기약 없는 재회를 약속하며 작별인사를 했다. 배웅을 끝내고 집에 들어오니 스포크가 저 멀리서 날 게슴츠레 쳐다보고 있었다. 역시 낯선 사람은 경계하는 건가 생각했지만 스포크는 우리에겐 별 관심이 없는 듯 곧장 잠에 들었다.



조용한 항구마을의 따뜻한 , 이토록 완벽한 휴양지에서  5 내내 잠만 잤다. 일곱  먹은 고양이와 함께. 나는 늦은 오후에 간신히 침대를 빠져나와 대충 끼니를 챙겨 먹은 다음, 거실 소파에 누워 다시 잠들기 일쑤였다.



시간은 먹고 놀고 잘 때 가장 빠르게 지난다더니, 어느새 12월 25일 크리스마스가 찾아왔다.


우리는 갈비찜과 잡채를 만들었다. 얼마 전 예린이 나의 생일선물로 한국 음식을 잔뜩 주문해 준 덕에 우리에겐 온갖 한국 식재료가 있었다. 귀한 한국음식은 아껴먹는 게 상책이지만 곧 런던으로 떠나기 위해선 조금이라도 짐을 덜어내는 게 우선이었다.



오랜만에 고향의 냄새를 맡으니 음식이 끝도 없이 들어갔다. 결국 과식을 해버렸고 이번엔 배가 아프다는 걸 핑계 삼아 또다시 잠을 잤다.


어쩌면 퇴사 증후군일지도 모른다. 고작 한 달이라도 주 5일, 8시간씩 일했으니 나름 농장에서 직장생활을 했던 셈이다. 농장일에 적응했다고 생각했지만 모르는 사이 긴장감과 피로가 많이 쌓인 듯했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 휴식의 끝이 다가왔다. 뉴린에서 한 거라곤 고양이와 나란히 잠을 잔 것 밖에 없는데 말이다. 나는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아 발코니로 나갔다. 저 멀리 항구의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언젠가 다시 이곳의 바다를 볼 수 있을까?

내일이면 런던으로 떠난다. 보사번과 그리고 콘월과 영원한 작별을 할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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