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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후 Apr 19. 2023

언제나 모든 게 끝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WWOOF: 영국 시골농장 여행기 #14


조용한 시골마을도 가장 떠들썩해지는 날이 있다.

바로 크리스마스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농장에서 파티가 열렸다.

예린이 파티 때 마실 뮬드와인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파티가 열릴 비닐하우스를 꾸몄다. 종이 박스에 그림을 그려 벽을 꾸미고, 며칠 전 집에서 다 같이 만든 트리를 가지고 왔더니 허름했던 비닐하우스가 순식간에 파티장으로 변했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농장에 도착하고, 텅 비어있던 테이블 위로 음식들이 가득 놓였다. 음식을 먹으며 웃고 떠드는 사이 곳곳에서 사람들이 편지를 건네주었다.


Merry Christmas Jihu!

짤막한 편지였지만 잠깐 머물다가는 나를 생각해 준 마음이 고마웠다. 편지를 읽고 있던 중, 맞은편에 앉아있던 알리가 말을 걸어왔다.


지후 미안해,  편지를  준비했어. 사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편지를  썼거든.살짝 민망하다는  웃는 알리에게 나는 말했다.


파티가 끝나고 집으로 가려는 알리


괜찮아요! 편지 쓰는  얼마나 힘든지 저도 알거든요. 그런데 영국에서는 크리스마스마다 주변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나요? 꽤나 바쁘겠어요.


 그래서 크리스마스가  피곤해.  많은 편지를 대체 언제  쓰냔 말이야.  막힌 고속도로는  어떻고.


알리의 말에 난 웃으며 말했다.

그게 바로 명절이죠.


일 년 중 가장 반가운 날이지만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는 것에 대한 피로감은 국적을 불구하고 모두 한 마음인 듯했다.


사람들은 서로의 크리스마스 계획을 물어보기 바빴다. 나는 빵과 쿠키를 입안에 가득 넣기 바빴지만. 그때 엘사가 예린과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차를 마시고 있는 엘사


“너희는 이번주에 떠난다고 했지? 크리스마스는 어디에서 보낼 계획이야?”


그 순간 비닐하우스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봤다. 마치 ‘너희는 분명 우리보다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내겠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저희는  할아버지가 사는 뉴린 집에서 보내기로 했어요. 저희한테 집을 빌려주셨거든요.

예린의 대답에 다들 뉴린에서 크리스마스라니, 완벽하네.라고 말하며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


파티가 끝나고 농장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크리스마스의 설렘 때문이었을까, 이별은 즐겁고 따뜻했다.



이틀 뒤, 농장을 떠나는 날이 되었다.

집안 곳곳에 흩어진 물건들을 하나씩 챙기고, 한 달 동안 지냈던 방을 청소했다. 때마침 이른 연휴를 보내고 온 린지가 돌아왔다.


“린지-!” 나는 린지에게 달려가 안겼다.

다행이다, 아직 출발하지 않아서. 이미 떠났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린지는   길을 쉬지 않고 왔는지 잠시 숨을 돌렸다.


휴와 린지


우퍼 호스트인 린지는 집 관리와 우퍼들의 생활을 도와주는 사람으로, 내가 도착한 일주일 뒤에 보사번에 합류했다. 잠시 머물다가는 우리와는 달리 우퍼 호스트는 최소 반년에서 일 년간 이곳에서 지내기 때문에 린지는 우리보다 더 자세히 집과 보사번 농장에 대해 알아야만 했다.


하지만 보사번이 처음이었던 린지는 마치 첫날의 나처럼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린지에게 예린은 농장일을 비롯해 하루일과와 생활규칙 등 하나씩 차근차근 알려주곤 했다.


우리에겐 린지가 첫 우퍼 호스트였고, 린지에게 우리는 자신이 담당할 첫 우퍼였다. 그래서였을까, 린지는 우리를 진심으로 아끼고 좋아해 줬다.

린지는 활짝 웃으며 예린과 나에게 말했다.


“드디어 너희들도 소원을 빌 시간이야”



린지가 오면서 새로운 세리머니가 생겼다. 바로 이곳을 떠나기 전 촛불을 불며 소원을 비는 것이다.


먼저 성냥에 불을 붙이면 보사번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과 가장 슬펐던 순간을 얘기한다. 그다음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소원을 외친다. 마지막으로 촛불을 입으로 부는 순간 보사번으로부터 졸업이다.


떠나기 전, 언제나 다함께 모여 촛불을 불었다


린지는 촛불에 불을 붙인 다음 나에게 물었다.

“보사번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야?”


수많은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카드 게임으로 밤을 지새우던 날, 다 함께 펍에서 맥주를 마셨던 날, 하늘에 펼쳐진 별들을 하염없이 보았던 날. 모든 순간이 웃음으로 가득했지만 그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순간이 하나 있었다.


울고 웃고, 모든 순간은 늘 거실에 있었다.


거실에서 다함께 저녁을 먹는게 가장 행복했어요. 뭐랄까, 가족처럼 느껴졌거든요.

나의 대답에 린지가 활짝 웃었다. 내가 느꼈던 감정이 어떤 건지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럼 가장 슬펐던 순간은 언제였어?”

닭이 죽었을 때요. 아마 앞으로도 잊을  없을 거예요.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픈걸요.


아름다운 한달이었구나. , 이제 소원을  차례야.

린지는 촛불을 더 가까이 내밀었다. 난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이곳에서 만난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주세요’

나는 마음속으로 소원을 외친 후 촛불을 후-하고 불었다. 이어서 예린도 소원을 빈 다음 촛불을 불었다. 우리도 이제 졸업이다.


세리머니를 마치고 우리는 벤의 자동차에 짐을 실었다. 나는 차에 타기 전 마지막으로 린지와 포옹했다.


햇살 같은 너의 미소가 그리울 거야. 건강해야 .

린지, 정말 고마웠어요. 보고 싶을 거예요.



차가 출발하자 창밖으로 농장의 모습이 조금씩 멀어지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치 집을 떠나는  같았다. 떠날 때가 되어서야 드디어 이곳이 집처럼 느껴지다니. 언제나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금이 간 창문, 입김이 나올 만큼 추웠던 부엌, 삐그덕거리던 계단, 푹 꺼진 소파, 볏짚이 가득 쌓인 창고, 빨래를 널던 비닐하우스, 초록색 수레, 무거웠던 삽, 닭장과 감자밭, 그리고 보사번. 모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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