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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후 Apr 24. 2023

아무튼 올해는 걱정보단 희망

WWOOF: 영국 시골농장 여행기 #16


이른 아침, 비가 내리는 펜잔스 기차역은 안개로 자욱했다. 이곳에 처음 도착한 날에도 먹구름이 가득했는데, 떠나는 날에도 역시 하늘은 흐리다.



우리는 런던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가 출발하자 예린은 울기 시작했다.


예린은 어떤 일이 있어도  울지 않았지만 유독 사람과의 작별을 힘들어했다. 예린은 지난 며칠간 농장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면서 이미  차례나 울었지만 아직 눈물샘은 마를 때가 아닌 듯했다.


얼마  나는 한국에 있는 지원이와 연락을 했다. 고등학교 동기인 지원은 예린과 나의 성격을 너무나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지원에게 말했다.


“곧 농장을 떠나는데 예린이가 매일 울어서 큰일이야”

“참 신기해, 지후 너는 정이 많아 보이는데 생각보다 무덤덤하고 예린이는 무덤덤해 보이는데 생각보다 정이 많네. 너희는 서로 의외의 구석을 가지고 있구나”


고등학교 시절, 어릴 적부터 눈물이 많았던 나는 예린의 앞에서 툭하면 울었다. 예린은 그런 나를 보며 ‘뭐가 슬픈 건지 차근차근 얘기를 해봐’라고 말하며 날 달래주고는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지금 나는 눈물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내 옆자리에 앉은 예린은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옛날과 반대가 된 지금의 상황에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울고 있는 친구를 보며 웃고 있는 친구라니. 기묘한 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을 추스리기 위해 예린이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난 홀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바다의 모습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떠나기 전에는 상상 조차 되지 않았던 이 여행도 끝이 나는구나. 한 달이 지난 지금도 아직 내가 지구 반대편에 있다는 실감이 나지 않아서일까, 이 순간이 기나 긴 꿈처럼 느껴졌다.


기차 안은 크리스마스 명절을 보내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예린과 나는 아직 집으로 돌아갈 때가 아니었다. 늦은 저녁 런던에 도착하고 다음날 우리는 또다시 기차를 탔다. 프랑스 파리를 향해.



분명 파리가 마음에 들 거라고 말했던 오빠의 말처럼, 나의 마음은 곧바로 파리에 빼앗겼다.


파리의 거리는 연말의 설렘으로 가득했다. 나는 한걸음 한걸음 걸을 때마다 ‘와-‘소리를 남발하며 파리를 구경하기 바빴지만 예린의 마음은 아직 농장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그렇게 며칠이 흘러 2022년의 마지막날이 다가왔다. 예린과 나는 새해 카운트다운을 보러 개선문으로 향했다. 우리는 예린의 친구인 로미나를 만나 다 함께 새해를 기념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개선문은  세계 사람들이 모두 인 듯 핸드폰 전파도   잡힐 지경이었다. 우리는 간신히 로미나와 연락이 로미나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도착하려면 앞으로 20분은  걸어야 했고, 걸으면 걸을수록 개선문에서  멀어질 뿐이었다.


그때 골목길 반대편에서 사람들이 일제히 우리 쪽을 향해 달려왔다. 마치 좀비에 쫓기는 듯 엄청난 속도였다. 왠지 싸한 기분에 시계를 보자 이런, 11시 55분이었다. 예린과 나는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다 동시에 개선문을 향해 달렸다.


새해가 되기 5분 전, 파리의 거리를 달리고 있다니. 대체 내 인생은 하나도 예상할 수가 없다.


우리는 다행히도 개선문이 있는 거리에 도착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순간, 펑하고 폭죽이 터졌다. 하지만 불꽃은 건물과 사람들의 인파에 가려져 차라리 동영상을 찍고 있는 사람들의 핸드폰을 보는 게 더 잘 보였다.



희미하게 보이는 불꽃을 바라보자 지난 일 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대학교 마지막 학기와 졸업식, 인턴과 영국 농장생활. 한 치 앞도 알 수 없었던 지난 일 년은 공중에서 밝게 빛났다가 사라지는 불꽃처럼 이제 현재가 아닌 과거의 기억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사실 나는 새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새해는 설렘보다는 두려움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즐거운 순간보다는 힘든 순간이 더 많을 것 같고, 지금 이대로의 나를 인정하기보다는 지금 이대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끼여서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불꽃놀이를 보고 있는 지금, 나는 즐겁다. 앞으로 어떡하면 좋지라는 생각보단, 앞으로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여행이 길어져 이성의 끈이 느슨해진 것 같지만. 아무튼 이번 새해는 걱정보단 희망이다.



정신없었던 새해가 지나고 어느 오후, 뛸르히 정원에서 예린과 나는 커피를 마셨다. 엊그제 같았던 농장에서의 추억들을 얘기하며 우린 웃다가, 아쉬워하다가, 그리워했다.


“이제 곧 있으면 이 여행도 끝이네. 앞으로 뭐 하지? 넌 앞으로 뭐 하고 싶어?” 예린의 물음에 갑자기 마음 한구석 오랫동안 담아두고 있었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역시 일본에 가고 싶어.


한번 밖을 나가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더니. 나에게도 여행의 저주가 시작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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