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OOF: 영국 시골농장 여행기 #11
다니엘은 웃는 게 참 예쁜 사람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잘 웃는 사람은 무조건 좋아했다. 성격이 아무리 달라도, 실수를 아무리 해도 말이다.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온 다니엘은 언어학을 전공해서 영어뿐만 아니라 불어나 스페인어를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아시아 국가의 언어는 잘 모르는지, 예린과 내가 한국어로 대화하는 걸 듣고는 “중국어와 비슷하게 들리네”라고 말해서 예린과 내가 얼마나 잔소리를 했는지 모른다.
“한국어랑 중국어는 한자를 쓰는 거 말고는 닮은 점이 하나도 없어!”
그러면 다니엘은 멋쩍은 듯 머리를 만지며
“하하 그렇구나.”하고 웃는다.
다니엘은 나보다 일주일 먼저 이곳에 왔다.
이전에 농장에서 일했었다는 말에 다들 일을 잘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우리들 중 가장 많은 실수를 저지른 사람은 다니엘이었다.
다 같이 닭장 청소를 하던 어느 수요일 오후, 나는 더러워진 건초를 퇴비장에 버리러 가는 길이었다.
“지후!”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다니엘도 나처럼 수레를 끌고 오고 있었다.
우리는 나란히 퇴비장 앞에 도착했다. 내 키보다 더 높이 쌓인 퇴비를 보니 어떻게 버려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니엘은 고민에 잠긴 나를 보더니 말했다.
“지후, 왼쪽에 버리면 돼.”
“혹시 휴가 왼쪽에 버리라고 말했어? 우리 늘 오른쪽에 버렸었잖아.”
퇴비는 늘 오른쪽 구역에 버렸던 터라 다니엘의 말을 그대로 따르기엔 어딘가 영 찜찜했다. 우리의 실수로 일이 늘어나는 건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다니엘에게 말했다.
“닭장에 가서 애들한테 물어보자. 널 못 믿는 건 아니야. 혹시나 하니까!”
다니엘과 나는 닭장으로 돌아와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는 애들한테 물었다. 브루스와 예린은 휴로부터 퇴비장 왼쪽에 버리라는 말은 없었다며, 늘 하던 대로 오른쪽에 버리면 되지 않겠냐고 말했다.
다니엘과 나는 다시 퇴비장으로 향했다.
나는 다니엘에게 말했다.
“다들 오른쪽에 버리면 된다고 말하니까 그냥 오른쪽에 버리자.”
그러자 환했던 다니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왼쪽에 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바뀌지 않은 듯했다.
다니엘은 날 쳐다보며 말했다.
“지후, 날 믿어줘”
그 말을 들은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니엘을 믿어주는 것 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일을 더 만드는, 실수일지라도 말이다.
결국 우리는 퇴비장 왼켠에 퇴비를 버렸다.
다음날, 역시나 그걸 본 휴가 왜 왼쪽에 버렸냐며 다시 오른쪽에 옮겨놓으라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뒤처리를 담당하게 된 사람은 다니엘이 아닌, 때마침 휴 옆을 지나가던 브루스였다.
그 후로도 다니엘은 땅에 물을 주다가 애써 심어놓은 새싹을 밟아버리거나, 벌레가 갉아먹은 채소를 수확해 버리는 등 종종 실수를 하곤 했다.
다니엘은 자신이 무언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마다 금방 시무룩해졌다. 그럴 때면 난 다니엘의 어깨를 토닥이며 “괜찮아 괜찮아. 큰 실수도 아닌데 뭐.”라고 말하며 위로를 건네곤 했다.
다니엘 다음으로 가장 많은 실수를 하는 사람이 바로 나였기 때문에, 다니엘이 실수를 할 때마다 왠지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다니엘의 미소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적어지는 듯했다. 어느 날 비닐하우스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다니엘의 세계를 산산조각 냈기 때문이다.
시작은 다니엘과 내가 함께 완두콩을 따던 날이다.
나는 누군가랑 함께 일할 때 먼저 말을 거는 편이 아닌데, 다니엘과 있을 땐 왠지 마음이 편해서 자주 얘기를 나누곤 했다.
음악과 꿈에 대한 이야기를 거쳐 오늘의 주제는 ‘사랑’이었다. 다니엘은 나에게 물었다.
“지후, 너는 운명의 사랑을 믿어?”
난 믿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다니엘의 눈빛이 반짝였다.
우리는 생각하는 게 비슷했다. 운명의 사랑을 믿고, 결혼을 하고 싶고, 아이를 키우고 싶어 했다. 우리는 각자 미래에 몇 명의 아이를 낳고 싶은지, 아들이 좋은지 딸이 좋은지와 같은 실없는 소리를 나누며 깔깔거렸다.
그때는 몰랐다. 손으로 톡 건드리면 바닥에 떨어지는 완두콩처럼 가볍게 나눈 이 대화가 어떤 폭풍을 가지고 올지.
일을 마친 저녁, 다 함께 거실 벽난로에 모여 앉아 몸을 녹이고 있었다. 다니엘은 갑자기 예린에게 운명의 사랑을 믿냐고 물었다.
예린은 얼굴을 찡그리며 “운명이라, 글쎄.”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다니엘은 예린에게 결혼을 하고 싶은지, 아이를 낳고 싶은지 물었다.
“언젠가 그런 마음이 드는 사람을 만난다면 할 수도 있겠지만 꼭 결혼을 하고 싶다던가, 아이를 낳고 싶은 생각은 없어.”
예린의 대답에 다니엘은 누구한테 주먹으로 얼굴을 맞기라도 한 듯 벙쪄있었다.
다니엘은 예린에게 말했다.
“도대체 왜?”
이런, 건드리지 말아야 할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결혼을 하고 싶은 자가 결혼을 할 생각이 없는 자에게 의문을 가지는 순간 시작된다. 결코 서로를 이해시킬 수 없는 토론이.
사랑과 열정의 나라, 이탈리아 답게 사랑에 대한 다니엘의 믿음은 굳건했다. 일생일대의 운명의 상대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한 사람만을 평생토록 사랑하는 게 바로 다니엘이 생각하는 인간의 삶이자 살아가는 이유였다.
하지만 다니엘이 믿었던 사랑의 세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폴린과 브루스가 대화에 참여하면서 결혼과 출산뿐만 아니라 꼭 한 사람만을 사랑해야만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까지 나왔기 때문이다.
다들 돌아가며 얘기를 하는 동안 다니엘의 표정은 점점 복잡해졌다. 각자 결혼을 하고 싶지 않은 이유,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는 이유, 한 사람만 사랑하지 않아도 될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했지만 반대로 다니엘은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짧고 간단한 이유였다.
당연하니까.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래왔고 그래야 행복하니까.
그게 바로 다니엘이 생각하는 결혼, 출산,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하는 이유였다.
신을 믿는데 이유가 없듯이 사랑에 대한 다니엘의 믿음도 별 이유가 없었다. 그런 다니엘을 다른 아이들이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따발총을 날리듯이 모두 다니엘에게 반론을 펼쳤고 결국 3:1의 싸움에서 밀려 버린 다니엘은 나를 애처롭게 쳐다봤다.
다니엘은 마치 ‘지후, 너도 나처럼 운명도 믿고 결혼도 하고 싶고 아이도 낳고 싶다고 했잖아. 나 좀 도와줘.’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다니엘을 도와줄 힘이 없었다. 피곤하고, 춥고, 배가 고파서 눈이 감기기 직전이었다.
치열했던 토론은 저녁식사를 핑계로 어영부영 마무리가 되었지만 다니엘은 그날의 대화가 꽤나 충격이었는지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아무리 설명을 해도 다니엘은 이해하기 어려운 듯했고 반복되는 대화에 다들 지쳐버려 다니엘이 또다시 얘기를 꺼내려고 할 때면 누군가 “다니엘, 제발 그 얘기 좀 그만하자.”라고 부탁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토론의 패배는 다니엘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며칠 후 다니엘이 이곳을 떠나는 날이 되었고, 이른 아침, 우리는 작별인사를 나눴다. 한 명 한 명 포옹을 했고 마지막 차례는 토론 때마다 의견이 가장 부딪히던 폴린이었다.
다니엘은 폴린을 안아주며 말했다.
“폴린, 미래에 꼭 멋진 남편을 만나길 바랄게.”
그 순간 모든 아이들이 벙쪘다. 인생에 결혼이 꼭 필요한 건 아니라고 주구장창 말했던 폴린에게 멋진 남편을 만나길 바란다니. 설득도 이해도 아닌, 단순히 상대방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 것이 승리라면 이번 토론의 승자는 다니엘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니엘의 굳은 믿음과 뚝심이 꽤나 멋있어 보였다. 나는 지금껏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려는데 너무 많은 애를 써왔기 때문이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가진 생각을 자주 바꾸려 했고, 타인에게 이해받기 위해 너무 많은 설명을 하려고 했다.
어쩌면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려는 건 괴롭고 힘들다. 하지만 불가능한 건 역시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버리면 마음이 편안하다.
다니엘은 마지막까지 자신과 다른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런 다니엘을 보면서 때로는 이해라는 것 자체를 잠시 멈춰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별인사를 마친 후, 다니엘은 차에 타기 전 나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다니엘이 떠나자마자 난 편지를 읽었다.
‘지후에게,
너랑 함께해서 정말 즐거웠어.
네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행복하길 바랄게.’
짧은 글이었지만 진심이 묻어난, 따뜻한 편지였다.
아이들은 편지의 내용을 알려달라며 나에게 달려왔다. 우리들 중 다니엘에게 편지를 받은 건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별 내용은 없었다고 둘러말하며 후다닥 2층 방으로 올라갔다.
등 뒤로 누군가가 소리쳤다.
“지후! 설마 그거 러브레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