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OOF: 영국 시골농장 여행기 #10
농장생활 3주 차가 되어서야 이곳의 생활이 조금씩 몸에 익어지는 걸 느낀다. 가끔씩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안부를 나눌 때면 꼭 한 번씩 등장하는 질문이 있다.
“거기에서 지내는 건 어때? 뭔가 여유로워 보이던데.”
초록빛 들판이 펼쳐진 마을을 떠올릴 때 평화롭고 편안한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곳에서 흙과 풀을 만지는 삶이라면 조금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 여기 온 뒤로 하루에 세끼, 세 그릇씩 먹어. 일이 너무 많거든.” 나의 대답에 친구들은 모두 놀란다.
“한국에서 하루 두 끼 먹는 애가 그렇게 많이 먹는 거면 도대체 일을 얼마나 시키는 거야?”
핸드폰 너머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려오면 나는 “그래도 이곳에 오고 나서 한 번도 안 아팠어.”라고 말하며 친구들을 안심시키곤 했다.
나는 영국 콘월의 세인트저스트에 있는 보사번 농장에서 주 5일, 하루에 8시간씩 일하고 있다.
늦가을의 콘월은 오전 7시 15분쯤 해가 뜨고 오후 5시쯤 해가 진다. 자고로 농사란 태양의 시간을 따라야 하는 법. 일은 주로 오전 9시부터 시작하지만 닭장 당번을 맡은 날은 오전 7시 반부터, 야채꾸러미를 배달하는 날인 금요일은 오전 8시부터 시작한다.
이곳에서 하는 일은 요일마다 조금씩 다르다.
월요일은 주로 채소를 수확한다. 이곳의 채소들은 농장에서 운영하는 ‘팜 샵(Farm Shop)’과 매주 토요일마다 열리는 마을 시장에서 판매된다.
계절에 따라 작물의 종류가 다르지만 지금은 양파와 감자, 양배추와 고추, 당근과 샐러드 등을 포함해 대략 20가지의 채소를 키우고 있다.
화요일은 주변 마을에 살고 있는 발룬티어들과 함께 일한다. 평소에는 농장지기 ‘휴’를 포함해 4-5명과 일하지만 이날은 10-12명 정도의 사람이 모여 하루종일 농장이 시끌벅적하다.
발룬티어 대부분이 50대에서 70대 사이의 어른들이라 그런지 가끔씩 내가 대가족의 막내손녀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수요일은 감자 수확과 닭장 청소를 한다. 일은 두 가지밖에 없지만 일주일 중 육체적으로 가장 힘든 날이다.
수확한 감자는 매주 금요일마다 배달하는 야채꾸러미에 들어가는데, 총 100kg의 감자가 필요하다. 이 날은 오전 내내 감자를 캐고, 캐고, 또 캔다.
커다란 포크처럼 생긴 삽으로 땅을 뒤집으면 흙에 파묻힌 감자가 보인다. 그러면 손으로 감자를 일일이 주워서 바구니에 담는다.
단순한 작업이지만 영국의 삽은 들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근육통이 생길 만큼 무거워서 수확을 마치고 나면 나는 바로 감자밭에 대자로 누워 뻗어버리곤 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점심으로 밥 두 세 그릇을 단번에 비워내고 나면 대망의 닭장 청소가 시작된다.
수백 마리의 닭이 3개의 닭장에서 살고 있는데, 아무리 깨끗이 청소해도 일주일이면 금세 냄새가 나고 더러워진다. 새롭게 갈아줄 건초와 청소 도구를 챙겨 닭장에 가면 닭들은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난리가 난다.
“너희들 좋으라고 청소해 주는 거야 얘들아!”
닭들이 얼마나 시끄러운지 귀가 얼얼해서 나도 똑같이 소리를 지르지만 인간의 마음을 닭이 알아줄 리가 없다.
먼저 삽으로 바닥에 딱 붙어버린 건초를 긁어내 수레에 담는다. 더러워진 건초는 퇴비로 사용해서 수레가 가득 찰 때마다 퇴비장으로 옮겨 놓아야 한다. 그동안 다른 한 명은 닭들이 자주 앉아있는 난간이나 알을 낳는 곳에 쌓인 이물질을 작은 스크래퍼로 긁어낸다. 모든 청소가 끝나면 새 건초를 바닥에 가득 깔아준다.
닭장 청소가 끝나면 온몸에서 냄새가 나고 허리는 끊어질 듯이 아프다. 닭장 안은 천장이 낮아서 내내 허리를 숙이며 청소를 하는데 상체를 잠깐 일으키면 그 순간 꽝하고 천장에 머리를 박는다. 키가 제일 작은 예린은 한 명씩 머리를 박을 때마다 웃으며 놀려대곤 했다.
목요일은 전날의 후유증으로 아침부터 온몸이 쑤시지만 화요일처럼 발룬티어들이 오는 날이라 생기가 넘친다. 이 날은 매주 금요일마다 보내는 야채꾸러미에 들어갈 채소를 수확한다.
농장지기 ‘휴’가 사람들에게 각각 필요한 채소를 알려주면 모두 뿔뿔이 흩어진다. 각자가 맡은 채소를 들고 ‘패킹셰드(Packing Shed)’로 다시 모이면 저울에 무게를 잰 다음 정량에 맞춰 포장한다. 야채 꾸러미는 제시간에 꼭 끝내야 하는 일이라 오후 내내 모두가 바쁘게 움직인다.
금요일은 오전 8시부터 야채꾸러미에 들어갈 샐러드를 수확한다. 샐러드는 다른 채소에 비해 빨리 시들어버리기 때문에 야채 꾸러미를 배달하기 직전에 수확해야 한다. 하지만 겨울철이라 샐러드가 자라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서 주문량에 비해 늘 부족하다.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수확하는데 누군가
“이 정도면 10kg 다 채우지 않았을까?”라고 말하면 예린이가 바구니를 들고 무게를 재러 간다.
하지만 예린이 저 멀리서
“아직 10kg 아니야. 샐러드 더 필요해!”라고 말하면 우리는 비명을 지른다.
“세상에서 샐러드가 제일 싫어!”
그렇게 샐러드 수확을 끝내고 나면 모든 야채꾸러미를 자동차 트렁크에 차곡차곡 쌓는다. 오후에는 잡초를 뽑거나 비닐하우스 청소 등 그때그때 필요한 잔일들을 하다 보면 길었던 한 주가 드디어 끝난다.
쉬는 날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예린과 나는 매주 주말이 휴일이어서 평일은 평일답게 열심히 일하고, 주말은 주말답게 콘월 이곳저곳을 놀러 다녔다.
주 5일, 하루에 8시간. 한국에서 회사를 다녔던 것과 똑같이 일하지만 달라진 점이 몇 가지 있다.
바로 밥을 잘 먹고 소화가 잘된다는 것. 그리고 늘 아프던 허리가 아프지 않다. 밥을 잘 먹고 소화가 잘 되는 건 당연하다. 먹는 만큼 몸을 움직이니까 금세 배가 고프고 금세 배가 꺼진다.
하지만 허리 통증이 사라진 건 조금 신기하다. 이곳에 온 이후 내 체력이 이렇게 형편없었나 생각이 들 만큼 모든 일이 힘에 부치기 때문이다. 감자가 잔뜩 들어간 상자를 옮기려는데 너무 무거워서 예린이가 나 대신 들어줄 정도였다. 일이 끝나고 나면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지만 그렇다고 내내 아픈 곳은 없었다.
흔히 몸이 아닌 머리를 써야 똑똑하다고 말하지만 머리가 아닌 몸을 써야 건강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똑똑하면 모든 사람들이 칭찬해 주지만 건강하다는 이유로 칭찬해 주는 사람은 지구상에 아마 할머니, 할아버지 말고는 없을 거다.
똑똑한 삶과 건강한 삶 중에서 내가 지금 어떤 걸 원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똑똑하면서도 건강하고, 건강하면서도 똑똑하게 사는 건 안되려나? 뭔가 될 것 같기도 한데 말이다.
옆에서 예린이가 말을 건다.
“온몸이 쑤신다 쑤셔. 지후야 내 허리 좀 발로 밟아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