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가방

나와 영국과 풋귤과 와인

by 최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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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인생이 여기에 다 담겨있네.”


텅 빈 집 안에 우두커니 서 있던 여행용 가방을 보며 부동산 중개인 사만사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나에게 필요한 것들,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만을 고르고 골라 가방 안에 챙겨 뒀었다. 10년 영국살이 짐은 그 전날까지 부랴부랴 싸고 또 싸서 친한 친구 부모님의 런던집 창고에 맡겨 둔 상태였다. 실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몇 개월만 맡긴다는 생각에 부탁을 드렸고 흔쾌히 도와주셨다. 침대며 가구는 새로 이사 들어올 세입자에게 헐값에 팔아넘겼다. 사만사가 중간에서 도와줬다.


2019년 5월의 어느 화창한 봄날, 나는 2년 넘게 월세로 산 영국 남동부의 작은 마을 ‘마게이트(Margate)'집을 떠나고 있었다. 기다란 해수욕장과 북해가 방에서 보이는, 정이 참 많이 든 집이었다. 사만사는 ‘바다가 보이는 줄리엣 발코니가 있는 집’이라며 여심을 자극하는 월세 광고를 냈었더랬다. 장편영화 <커런트 워(The Current War)>에 스텝으로 일할 때 촬영이 없던 아침에 겨우겨우 집을 보러 가 바로 계약하자고 할 만큼 마음에 쏙 드는 집이었다.


나는 현관문 앞에서 집 열쇠를 사만사에게 돌려주고는 그동안 너무 고마웠다며 그녀를 꼬옥 껴안았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영국 방방곡곡을 자주 여행하는 부동산 중개인이었다. 도움이 필요할 때 연락이 닿지 않아 가끔 불편할 때도 있었지만 큰 키에 볼록한 배, 그럼에도 당당히 무릎까지 내려오는 화려한 정장 드레스를 즐겨 입는, 남자아이 둘을 키우는 구글 후기 별점 다섯, 전문직 여성이었다.


새로 이사 온 아래층 젬마가 마리화나를 피우는 것 같다고, 이 건물은 금연 건물 아니냐고, 냄새가 올라와서 못 살겠다고 이메일을 남기면 퇴근길에 코를 킁킁거리며 탐정 눈빛을 하고는 문을 두드리던 동네 이웃이었다. 런던에서 마게이트로 이사 올 때부터 같이 데려와 키우던 야자나무와 월계수를 입양하겠느냐고 묻자 흔쾌히 그러겠다고, 잘 돌보겠다며 그리고 고맙다며,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정든 내 나무를 허튼사람에게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한국은 언제 가는 거야?”

“오늘 저녁에 비행기 타요.”

“아, 그렇게 빨리?”


런던으로 가는 열차 시간에 조금 여유가 있어 마지막으로 백사장을 보고 갈 겸 나는 바다로 향했다. 커다랗고 샛노란 여행용 가방이 푸르른 바다 앞에 멈추어 나와 함께 북해를 바라보며 서있었다.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고 따스했다. 정신없이 지나간 한 달의 장막을 알리기라도 하듯이 그제서야 북해 하늘을 유유히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이 보였다. 전에도 날고 있었을 것이다. 중장비가 새벽에 작업을 했는지 모래사장에는 두터운 바퀴 자국이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영국 사람들은 해조류를 먹지 않는 탓에 큰바람이 지나가고 난 후에는 미역과 다시마가 파도에 떠밀려와 백사장을 가득 덮곤 했다. 조금만 놔두어도 파리가 괴고 냄새가 나서 마게이트군에서는 주기적으로 해조류를 중장비로 수거하곤 했다.


이제 이 동네를 알아가나 할 즈음, 그리고 오래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 싱글로서 내 삶이 비로소 회복되고 완성되었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런던으로 다시 이사를 가야 하나 아니면 10년 영국살이를 정리하고 한국으로 아예 돌아가야 하나, 생각만 반복하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러던 참에 제주도에서 오빠가 급작스레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마게이트의 집을 빼고 짐은 런던에 잠시 놔두고 한국에 머물면서, 어디에 정착할지 시간을 좀 더 갖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그곳을 떠날 결심을 했다. 불완전한 결심이었다.


그 뒤로 제주도 부모님 댁에 머물며 영화제 참석과 영화 통역일로 한국에서 영국을 두 번 왔다 갔다 했다. 그러다 몇 개월 뒤 2020년 1월, 코로나가 터졌다. 나의 불완전한 결심이 불가항력적인 재난 앞에서 두말할 것도 없이 확실하게 결정 나는 순간이었다.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는 2년 동안 한국에 발이 묶이게 되었고 영국에는 2021년 12월 오미크론을 뚫고 가서야 비로소 도착할 수 있었다. 물류대란까지 겹쳐 나는 2019년 5월 마게이트에서 싼 내 짐을 2022년 6월에야 서울에서 받아볼 수 있었다. 3년이 훌쩍 지나고서였다.






© 글, 사진 최정은 @greentangerine_jeju


이 글은 2022 영등포문화재단 술술센터 예술과 기술을 잇는 '누구나술술' 사업의 지원을 받아 진행되었습니다. @soolsool_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