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9개월 차, 내 생애 최장기간 백수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직장인이었다면 결코 짧지 않았을 수개월의 시간이, 백수라는 이름 앞에선 속수무책 없이 흘렀다.
누구 하나 나를 나무라는사람은 없었다. 더불어 걱정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재취업이나 커리어에 있어서 만큼은 그랬다. 어떻게든 꾸역꾸역, 버티고 갈아타 온 덕일 거다. 그 흔한 지인 소개나 추천도 없었으니 말이다.
여하간 며칠 뒤면이 행복한 시간과는 종지부를 찍는다. 백수로서의 마지노선 위, 생각해 보면 9개월 간 난 참 많은 것들을 얻었다.
첫 번째, 건강해졌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건강한 신체와 생활 습관을 얻었다. 시작은 비루한 다이어트였지만,그 끝은 창대했다.
목표 체중을 감량했고 건강한 식사가 생활화됐으며 운동이 좋아졌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활동을 꼽으라면 숨도 안 쉬고 답할 수 있었던 '등산'. 이걸 내가 하고 있으니말 다했다. 가장 신기해하는 사람은 부모님이었다. '이게 내 새끼가 맞나'라는 눈빛을 몇 번이고 보여 주셨다.
빠지는 살에도 신이 났지만, 지독하게 해 내고 마는 내 근성에 더욱 만족스러웠던 시간.이 정도면 '기특상' 정도는 받을 만하지 않을까. 그런데생각해 보니 상이 있다면 남자친구가먼저다. 나를 괴롭힐 명목으로 등산 가자 꼬드겼던 그. 요즘은 등산 가잔 얘기만 해도 더없이 난색을 표한다.
두 번 째는,정체성이다.
상당히 거창한 느낌이지만, 내가어떤 걸 좋아하고 잘하는 존재인지, 뭘 해야 즐겁고 안정적인 기분이 드는지 등을비로소 깨닫는 시간이었단 얘기다.
난 세상 지독한 ISFJ로, 스스로에게 유독 엄격한 계획변태다. 백수임에도 쉬는 날침대에 누워있는 나를견디지 못했고,다이어트를 포함해 자잘한 자기 계발을 거듭했다.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자격증도 따고, 연애도 즐겼다.역시 나는 게으른 완벽주의자가 맞았고, 살면서 처음으로 그 어떤 압박과 굴레 없는 나다운 시간을 보냈다.
세 번 째는, 소소하기 그지없는자립심.
부모님 세대에 비하면 요즘 30대는 애라고 하던데, 난 정말 그야말로 '신생아' 수준이었나 보다. 그 흔한 분리수거, 빨래, 기름기 많은 설거지 등 1부터 10까지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해 본 적이 없었던 것.
자취하던 백수 시절, 부지런히 쓸고 닦고 손수 간단식을 만들어 먹던 그 과정을 통해 난 정말이지 많은 것을 배웠다.
한 사람의 인간이 자생하는 일, 즉 혼자서살아간다는 건 나이를 불문하고 생각 이상으로 심오하고 성숙한 일이라는 걸 말이다.
그리고 그 종착점엔, 전에 없던 자립심이란 것이 생겨났다. 나를 위해 미약하나마 뭔가를 준비하고 대접하고 또 끝없이 주변을 정리해 가는 일련의 과정이, 내겐 퍽 즐거웠기도 했고.
됐고, 혼자 살고 싶단 얘기다.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구조만 아니라면.
이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은,
사실 이직 9개월 차의 어느늦은 저녁이다.
굳이 9개월이나 지난 백수 시절의 가르침을 뭐 하러 복기하냐 묻는다면, 다시 정신 차리고 글을 쓰고 싶어서라고말하련다.
백수 시절이 그토록 소중했던 건, 어쩌면 글을 쓸 여유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식단, 운동, 자취, 여행, 연애 등등 결국은 글로 기록하고 남김으로써 그 보람이 배가 되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