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하루 Jan 18. 2024

태아 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

불안을 내려놔야 한다.

보험사는 사람의 불안을 먹고 자란다. 특히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자식을 소유하려는 부모일수록 그들의 표적이 되기 쉽다. 이런 부모는 내가 이렇게까지 해줬다며 키워준 목록 리스트에 보험까지 끼워 넣는다.     


나 역시 태아 보험을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다. 뱃속에서 쑥쑥 크고 있는 쑥쑥이를 생각하면 보험에 미리 가입하는 것이 만기일을 고려했을 때도 더 유리하지 않을까 싶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딱 한 차례 괜찮다 싶은 보험에 거부당한 후 생각이 바뀌었다. 차라리 잘됐다고 말이다.

     

나는 분명 건강한 부모라고 생각했는데 지병이 많은 부모였다. 보험사 덕분에 내 몸 상태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다이렉트로 알아본 탓에 내 병력에 대해 일일이 체크하며 적어갔다. 문제는 너무 꼼꼼했던 나머지 제한된 시간에 늦어 초기화된 상태로 다시 적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다음날 보험사에서 연락을 받고 상담 직원분께 당연한 것도 하지 않았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분의 말씀은 이랬다.     


“수술을 한꺼번에 했다고 해서 한 군데에 쓰시면 안 되죠, 고객님”     


나는 제법 제대로 쓰겠다며 진단서에 나와 있는 병명을 모두 적었건만 전부 따로따로 적었어야 했다는 거다. 보험사의 매뉴얼에 따르면 병명이 5가지가 넘으면 가입이 불가해 더는 기록도 할 수 없게 만들어놨는데, 같은 날짜라고 한 군데에 몰아 적어 그분께 일을 늘려드렸으니 얼마나 귀찮으셨을까 싶기도 했다.      


사실 수술이라는 것도 내가 생각했을 땐 가벼운 수술 내용이었다. 자궁 외 임신이라 나팔관을 제거하는 수술이었고 떼버렸으니 이제는 문제가 아니지 않나 싶었다. 당시 의사도 작은 염증도 있으니 함께 떼면 되겠다고 웃으며 얘기했기에 정말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보험사의 입장은 달랐다. 이 수술로만 병명이 3개가 되었기에 기존에 있던 다른 병명 3가지를 더하면 총 여섯 가지가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나 나름대로 억울했다. 수술도 시술도 아닌 질염이 있던 것마저 병명으로 적어야 했기에 그랬다. 질염은 여자들에게 아주 흔한 질병으로 여자들이 겪는 감기라도 하는데, 이런 것까지 적으라고 할 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 감기나 코로나도 질병으로 적었어야 했냐며 조금은 짜증 섞인 투로 고객센터 직원에게 물었는데, 기준은 회사마다 다르니 그냥 다른 곳을 알아보라 권해주셨다.     


그렇게 나는 까였다. 까이니 더 불안해졌고 다른 곳을 찾아보고 알아봤다. 실비라도 있어야 한다는 다수의 의견에 태아 실비보험이라도 가입할까 싶기도 했지만 어차피 1년 갱신 상품이라 태어나고 드는 편이 더 낫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하나둘 내려놓을 수 있었다. 또다시 심사받고 까이는 과정은 없었지만 알아볼수록 이렇게나 많은 특약이 필요할까 싶어졌다. 의료보험도 잘 되어 있어 설령 인큐베이터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큰돈이 들지도 않는다고 하니 미리부터 겁낼 필요도 없었다. 여기에 보너스로 국가에서 하고 있는 공공목적 태아 보험에 0원으로 가입해 이거면 됐다 싶기도 했다.      


솔직히 희귀 질환에만 100만 원을 주겠다는 내용이라 내용 면에서도 부족하고 보험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조금 커진 의료보험 혜택으로도 보인다. 그런데도 이 덕분에 나는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아이를 믿어볼 수 있었다.     


부모의 걱정은 한도 끝도 없다. 걱정을 덜어주겠다는 상품에 너무할 정도의 돈을 쏟는 순간 그것은 사교육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미리부터 태어난 후에 들어놓을 비갱신 어린이보험도 알아놨다. 이미 실비부터가 갱신이니 어린이보험은 비갱신이어야만 했다. 쑥쑥 크는 아이를 보며 쑥쑥 자라는 갱신형 보험금이 비싸다 한탄할 수는 없지 않은가.      


분수를 지키고 내려놓는 자세는 중요하다. 걱정에 지배당하는 순간 아이에게 불안을 전파할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를 믿어주고 싶다.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 운동 사교육 정도는 시킬 수도 있겠지만 그 외에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봐서 시키든 말든 무던하게 지켜보고 싶다.      


그저 쑥쑥이가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자라줬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생활비를 요구하고 싶지 않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