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연인이다>의 애청자인 중년의 남성. 왜 그들은 그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걸까? 유사한 결로 <그리스인 조르바>도 뭇 중년의 남성들이 사랑하는 책이라고 한다.
이 책을 얻게 된 것은 교직생활 3년 차다. 당시 30대 중반의 학년부장 선생님께서 인생 책이라며 선물해 주셨다. 그 당시만 해도 책을 즐기던 때가 아니라 5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책장의 장식품으로 10년의 세월 동안 자리를 지켰다. 그래도 지방에서 서울로 시집오는 동안 내 곁에 있었던걸 보면 언젠가 읽고 싶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생각해 보면 이렇게 ‘언젠가’의 꼬리표를 달고 있는 책들이 꽤 있다) 이후 세네 번쯤 읽기를 시도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독서모임장을 하며 좋은 점은 강제적 독서 환경을 사심 가득 채워 조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선정한 것에는 조르바 완독을 실패해 온 지난날을 만회하기 위한 개인적 욕심도 서려있었다. 역시나 환경은 위대하다. 드디어 책을 손에 넣은 지 10여 년 만에 마지막 페이지에 도착했다.
읽는 내내 ‘왜 많은 사람들이 조르바를 로망으로 생각할까?’라는 의문에 답을 찾으려 했다. 조르바를 대표하는 단어는 ‘자유’다. 그에게 자유는 누군가로부터, 일로부터의 자유뿐 아니라 내면의 욕구까지도 벗어나는 것이다. 버찌를 먹고 싶으면 토할 때까지 몽땅 먹어서 다시는 먹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다. 처음에는 과하다고 생각했다. 뭐 그렇게까지. 그런데 조르바에 물들수록 그의 자유는 현재를 제대로 살게 하는구나 싶었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구속받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는 삶. 그래서 함께 하고 싶은 사람도, 하고자 하는 일도, 사랑도 스스로 선택한 만큼 진심을 다하게 된다.
아이를 낳기 전, 내 죽음을 상상하는 것은 자유로웠다. 어느 순간부터 내 죽음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가족. 나는 자유를 잃었다. 그런데 그것이 싫지 않다. 중년의 남성들이 <나는 자연인이다>와 <그리스인 조르바>를 보며 꿈꾸는 것은 어떤 자유일까? 어떤 무게를 내려놓고 싶은 걸까? 잘은 모르겠는 걸 보면 아직 나는 나를 구속하는 것을 사랑하고 있고, 그것에 지치지 않은 것이다. 10년 뒤 다시 만날 조르바는 내게 어떤 메시지를 줄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