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가 주는 삶의 회복탄력성
한없이 늘어져 쉬고 싶은 주말 아침.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몇 주째 내년도 사업계획을 구상하느라 수많은 회의와 토론을 반복했는데, 임원이 이번 주에도 토요일에 회의를 소집하셨다.
평일처럼 지하철에서 내려 터벅터벅 걸어 나오는데, 몸과 마음이 무거웠다. 역을 나와 3분쯤 걸으면 늘 들르는 커피숍이 있다. 출근길의 작은 사치다. ‘일단 카페인부터 섭취하자’고 마음먹었다.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작은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내가 지칠 때 하는 작은 리츄얼이다. 평소 안 보던 것을 탐색하듯이 쳐다보면서 머리를 비운다. 제24회 서울카페쇼를 홍보하는 엽서도 눈에 보였다.
커피를 받아 들고 신호등 앞에 서 있던 순간, 어디선가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길 건너 지하철역을 돌아봤지만 아는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피곤해서 헛것을 들었나.’
중얼거리며 건널목을 건넜다. 그로부터 몇 분 뒤, 전화가 울렸다.
“토요일인데 왜 출근해?” 익숙한 목소리였다.
경쾌하면서도 따뜻함이 묻어나는,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느슨해지는 그런 목소리.
나는 얼떨결에 되물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아까 건널목에 서 있는 거 봤지. 달리는 차 안에서 창문 내리고 복식호흡으로 크게 불렀는데, 못 들었어? 하하.”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누군가 제 이름을 부른 것 같긴 했는데, 정말 그게 맞았네요. 그런데 운전하면서 저를 보셨다니 신기하네요.”
주말 아침, 달리는 차 안에서 이름을 부르느라 복식호흡을 했다는 이야기. 그 의외성과 진심이 뒤섞여 마음의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그녀는 나보다 다섯 살 위, 20년 전 나의 사수였다. 일은 정확하게, 배려는 넓게 하는, 내가 닮고 싶은 선배 중 한 사람이었다. 퇴직 이후에도 서로 편하게 안부를 나누고 있는 좋은 인연이다. 오늘도 그랬다. 길지 않은 통화였지만 단 몇 마디가 순식간에 마음의 무게를 걷어냈다.
그 주말 아침 출근길에 새삼 느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이렇게 가벼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데일 카네기는 말했다.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것은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강력한 인간관계 기술이다.”
이름은 한 사람의 정체성이 압축된 기호다. 누군가 내 이름을 정확하게, 선명하게 불러준다는 건
‘나는 너를 기억하고 있다.’,
‘너는 내 세계에 속한 사람이다.’,
‘너의 존재는 여기서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건네는 행위다. 그래서 이름을 부르는 순간 우리는 상대를 역할이 아닌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
영국의 정신의학자 로빈 던바 교수는 ‘가까운 친구 몇 명이 한 사람의 정서적 안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감정적으로 지쳐있을 때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 몇 명이 우리를 다시 세우는 힘이 되는 것이다.
관계는 거창한 행동보다 작고 반복되는 행동에서 시작된다. 특히 이름을 건네는 일은 사소해 보이지만, 관계를 움직이는 가장 인간적인 첫 행동이다. 하루 온도는 누군가가 불러준 짧고 경쾌한 이름 하나로도 바뀐다. 그날 아침 신호등 앞에서 삶의 온도가 1도 올라가는 경험을 나는 분명하게 했다.
우리는 노년을 준비할 때 대부분 돈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하버드 성인 발달연구(Harvard Study)는 80년간의 연구 끝에 이렇게 말했다. “노년의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관계다." 돈보다 오래 남고, 경력보다 오래 기억되고, 건강보다 오래 우리를 버티게 하는 것은 바로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다.
27년 동안의 회사 생활에서 확신하게 된 것이 있다. 성과는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 보고서는 사라지고 실적표는 다른 종이에 덮인다. 하지만 사람이 불러준 내 이름의 온도, 그 목소리의 방향성, 그때의 공기만큼은 오래 남는다.
“○○씨, 잘 지냈어요?”,
“○○님, 오늘 얼굴 좋아 보이네요.”,
“커피 한 잔 할까요?”
이 짧은 호명들이 우리를 버티게 하고, 사람 사이의 온도를 만들고, 삶을 계속 살아갈 힘을 준다. 결국 직장에서도, 삶에서도 남는 건 사람이다.
전화를 끊고 사무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조금 전과는 전혀 달랐다. 어깨가 펴지고 마음은 밝아졌다. 그저 이름 하나만 불렸을 뿐인데, 그 순간이 지친 토요일을 살리는 작은 선물이 되어 돌아왔다.
오늘 나는 누군가의 이름을 먼저 불러볼 생각이다. 한 사람의 하루가 조금은 가벼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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