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피렌체에서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 나 혼자 피렌체 시외로 나왔을 때 아내와 아들은 피렌체 역사 지구를 가볍게 둘러봤다. 아들의 휴대폰이 없어진 것은 내가 돌아왔을 때 알았다. 해외 여행 중 예기치 않은 사건/사고가 발생하는 것만큼 당황스러운 일이 있을까. 우리는 모두 긴장했다.
"엄마랑 점심 먹고 나서도 휴대폰 있었어."
가장 당황한 사람은 아들이었다. 아내와 나는 차분한 말투로 자초지종을 물었지만 목소리는 무미 건조했다. 점심 먹은 식당에 놔두고 오지 않았다고 확신하면서도 목소리는 떨렸다. 아내와 나는 여행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 이성적으로 행동했지만, 오히려 그 행동이 아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여행은 감성인데 이성이 움직이니 아들도 어색했을 것이다.
피렌체 두오모 대성당 내부에서 본 천장
아들의 휴대전화는 지난해 여름방학 때 태국 치앙마이에 가면서 '비상용'으로 장만했다. 아들은 2주간 치앙마이 국제학교에서 운영하는 여름캠프에 참가했는데, 영어를 못하는 아들이 연락할 수 있도록 마련한 것이다. 전자기기는 '최대한 늦게'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해왔지만, 아들은 예정보다 빨리 스마트폰을 갖게 됐다. 아내가 4년간 쓰던 공기계에 월 2200원 짜리 알뜰요금제로 가입했다. 데이터 1기가에 무료 통화 200분, 무료 문자메시지 50통을 제공한다. 휴대폰은 아들의 보물 1호가 됐다.
호텔 방을 샅샅히 뒤져도 아들의 휴대전화는 보이지 않았다. 벨소리나 진동을 감지할 수 있도록 몇 차례 전화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들과 아내가 점심 식사를 했던 식당도 가봤지만 소용 없었다. 40여분 돌아다녔을까. 잃어벼렸다고 체념하고 휴대폰 찾기를 중단했다.
다시 여행 모드로 돌아왔지만 어색한 분위기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피렌체 레스토랑 '자자'에서 '베키오다리'로 산책하는 동안 아들은 굳은 표정이었고 말이 없었다. 아내는 관리 책임을 느꼈는지 아들과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여행자보험에서 보상받을 수 있는지 분주히 검색했다. 풀 죽은 아들을 보며 나와 아내는 연신 '괜찮다'고 했지만, 아들은 '이제 휴대폰 사달라고 하지 않겠다'고 살짝 울먹이며 말했다.
순간 이게 뭔가 싶었다. 손바닥만한 휴대폰 하나가 아들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고, 우리 가족의 첫번째 유럽 여행을 망치려고 했다. 휴대폰이 없다고 여행을 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왜 처음부터 쿨하지 못했을까. 스마트폰을 잃어버린 것은 아들이지만 여행을 망치는 것은 나였다. 3만원 짜리 휴대전화가 결혼 10주년 가족 여행을 흔들고 있었다.
피렌체 공화국(레푸블리카) 광장의 상징 회전목마
분위기를 반전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다. 피렌체 공화국(레푸블리카) 광장을 지나는데 마침 회전목마가 불빛을 밝히며 우아하게 돌고 있었다. 회전목마는 레푸블리카 광장의 상징이다. '삼국지'를 좋아하는 아들은 말 타는 것에 대한 로망이 있다. 진짜 말을 탈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 가끔씩 회전목마를 타면서 '관우'가 돼 본다. 아들은 여행 오기 일주일 전에도 서울 잠실 롯데월드몰에서 임시로 운영하는 회전목마를 탔었다.
"회전목마 한번 타 볼래." "응..."
아들의 힘없는 목소리를 들으니 더 미안했다. 손님이 없었다. 넓은 회전목마에 아들 혼자 탔다. 아들이 더 쓸쓸해보였다. 하지만 회전목마가 한바퀴씩 돌 때마다 굳었던 아들의 표정은 조금씩 펴졌다. 아들은 사람이 많고 적음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회전목마를 타고 있다는 이 순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한번 더 태워주고 싶었는데 아들은 괜찮다고 했다.
우리는 더 이상 휴대전화를 언급하지 않았다. 각자 사고 싶은 것을 얘기했다. 아내는 가죽 장갑을, 아들은 호두까기 인형을, 나는 가죽 가방을 말했다.(피렌체는 가죽 공방이 유명하다.)
피렌체 베키오다리 전경
해질녘 베키오다리에서 사진을 찍고 여유를 누렸다. 아내는 다리 건너편 가죽장갑 전문점 '마도바(MADOVA)'로 가서 장갑을 사더니 돌아오는 길에 베키오다리 위에 있는 귀금속 가게에서 귀걸이도 샀다. 아들과 나는 아무것도 사진 않았지만 평화로운 분위기를 되찾아 기분이 좋아졌다. 티본스테이크 전문점 '델오스떼'에서 맛있게 저녁까지 먹으니 모든 게 아름다웠다. 지금 이 순간이 다시 올 수 있을까? 아쉬우면서도 행복했다.
소화를 시킬 겸 피렌체 역사 지구를 천천히 산책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피고한 몸을 빨리 누이기 위해 샤워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내가 큰 소리로 나를 불렀고 뒤이어 아들이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빠, 휴대폰 찾았어."
아내가 옷을 정리하기 위해 캐리어를 열었는데 거기에 아들의 휴대폰이 있었다. 아들 휴대폰은 현지 유심이 없어서 비활성화돼 있었다. 아내는 점심을 먹고 돌아왔을 때 무심코 아들의 휴대전화를 캐리어에 넣은 것 같다고 기억했다. 아내와 아들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활짝 펴졌다.
피렌체 가죽장갑 전문점 마도바(MADOVA)
사실 나는 그렇게 기쁘진 않았다. 저것 때문에 아들의 마음이 아팠고 우리의 소중한 여행을 망칠 뻔 했다는 분한 마음이 들어서다. 덕분에 인생 공부를 했다. '아름다운 순간을 지키기 위해 대범해지자.' 대세에 지장 없으면 쿨해지는 것도 방법이다. 조금 손해보더라도 행복해지는 게 건강에 좋다.
일본 소설 '실락원'을 쓴 와타나베 준이치의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라는 책을 보면, 원활한 혈액순환은 건강의 첫번째 조건이다. 피가 부드럽게 흐르게 하려면 부교감신경이 작용하고 교감신경은 작용하지 않는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긴장이나 흥분, 불안, 분노, 미움, 추위 등을 느낄 때 교감신경이 활성화되고 즐거움, 기쁨, 따뜻함을 느낄 때는 부교감신경이 활성화된다. 부교감신경이 활성화되면 혈관이 활짝 열리고 건강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
완벽주의자를 표방하는 나는 매사에 예민하고 민감하다. 여행할 때는 더욱 더 말초신경이 곤두선다. '결혼해야 어른이 된다'라는 옛 말이 있다. 결혼해서 자녀를 키워야 어른이 된다는 뜻일 것이다. 부모도 아이를 키우지만 아이도 부모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