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는 카메라를 좋아했다. 정확히는 부속품이 완벽하게 맞물리며 움직이는 기계 덩어리를 좋아했다. 그래서 설정을 바꿀 수 없는 자동 카메라나 팅-하고 찍히는 똑딱이 카메라보다 수동 SLR 필름 카메라를 좋아했다. 필름을 지이익 감는 소리부터 철커덕 장면을 잡아내는 소리까지. 그때의 나는 카메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지만 이제는 알겠다. 이 무거운 고철 덩어리를 그 아이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그 아이는 늘 맨 앞자리 맨 왼쪽 자리에 앉았다.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12시 방향 시선에 걸리는 자리. 그러나 교수의 시야에는 잘 들어오지 않는, 맨 앞이지만 존재감이 없는 그런 자리에 그 아이는 앉아 있었다. 나는 앞도 뒤도 아니고 왼쪽도 오른쪽도 아닌 자리에 앉곤 했다. 애매한 나의 애매한 자리를 향해 걸어가면서 강의실을 둘러보는 척 힐끔 그 아이를 확인하곤 했다. 그 아이는 앞에 수업이 없는 것인지 늘 일찍 강의실에 도착해 있었다. 체크무늬 셔츠, 청바지, 동그란 안경, 하나로 단정하게 묶은 머리, 책상에는 노트북과 책 한 권. 그리고 손목에는 작은 휴대용 카메라가 달랑거렸다. 그 아이는 수업 시작 전까지 작은 카메라를 만지작거렸다. 내 자리에서 그 아이는 언제나 왼쪽 시야 한구석을 차지했고, 시야에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나는 은근슬쩍 그 아이를 구경하였다.
시원하다 못해 쌀쌀한 에어컨 바람과 쿰쿰한 여름 습기가 감도는 강의실은 졸음으로 가득했다. 학생들의 빠져나온 영혼들이 둥실 떠다니며 강의실 빈 공간을 채웠고 그만큼 비좁아진 신선한 공기는 다시금 몸에서 영혼을 밀어내었다. 교수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웅얼거리기 시작하면 나의 시선은 어김없이 그 아이를 향했다. 이상하게 그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 공연히 동요하던 마음도, 잡다한 걱정도 차분히 가라앉는 것 같았다. 한결같은 그 아이의 한결같은 뒷모습은 나에게 목요일 오후, 한 주의 마지막 수업을 상징했다.
단조로운 체크무늬 셔츠를 걸친 그 아이는 자기 특유의 나른함 때문인지 교수의 졸음 공격에도 타격을 받지 않는 듯하였다. 그렇다고 열정적인 모범생은 아니었다. 그저 졸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흔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흔하지는 않은 학생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그 아이가 전형적인 모범생인 줄 알았다. 수수하고 조용하여 선생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문학소녀의 분위기랄까. 그러나 나는 분명히 보았다. 노트북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그 아이는 수업 필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프로그램은 일러스트레이터였고, 그 아이에게 수업 3시간은 사진을 편집하는 시간이었다. 맨 앞 맨 왼쪽 자리에서 분주히 놀리는 손이 수업 필기가 아님을 교수는 알고 있었을까. 적어도 그 아이의 대각선 뒷자리, 앞도 뒤도 왼쪽도 오른쪽도 아닌 자리에 앉은 나는 그의 일탈을 알고 있었다. 별것 아닐지라도, 비밀이 아닐지라도, 그 아이의 소소한 작업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그 아이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수업 시간에 가장 먼저 등교하여 1열에서 딴짓을 하는, 카메라를 좋아하는 아이라니. 내 경험 상으로는 요즘 학생들은 극과 극에 있다. 아예 수업을 빠지고 놀러 다니거나, 학점에 목숨을 걸며 공부하거나. 늦게 오는 것도 아닌데 왜 뒷자리가 아닌 그곳에 앉기를 선호할까. 수업은 듣지 않지만 맨 앞자리를 고수하는 뚝심을 감히 재단하며 감탄하곤 했다. 게다가 그 수업이 ‘사진이론’인데다 그 아이의 전공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호기심이 동했다. 다른 학과의 전공 수업을 굳이 찾아 들으면서 저렇게 딴짓을 해도 되는 걸까. 아무리 사진에 관한 과목이라도 사진을 편집하고 있어도 된다는 말은 아닐 텐데. 나의 애매한 모범생 근성에는 부합하지 않은 생각이었다. (물론 이런 나도 완전한 모범생은 아닌지라 그 아이의 뒷통수를 구경하며 이런 상념에 빠지긴 했지만. 아예 딴짓은 하지 않는 것이 나의 기조였다.)
무엇보다도, 왜 하필 카메라와 사진을 좋아하는 것일까. 오히려 예술이론 전공인 나는 사진에 별 관심이 없었기에 더 궁금했다. 수업 때문이 아니라 그 아이가 좋아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사진에 관심이 생길 뻔했다면 너무 짝사랑의 표본 같은 발언인가. 그러나 그 아이에게 뚜벅뚜벅 다가가서 말을 걸기에는 나에게 부끄러움이 많았다. 너에게 관심이 있다는 작은 표현 하나만으로도 내가 그 아이를 지켜봐 온 음침함을 들킬 것만 같았다.
어느 목요일 오후, 교수가 공지를 발표했다. 이번 학기 과제는 개인이 아니라 팀으로 진행하겠다고.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인문대에서 흔치 않은 팀플 과제가 하필 내가 듣는 수업에서 일어나다니. 나 같은 성격의 사람은, 게다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복학생인 나 같은 사람은, 누군가와 조를 짜는 것부터가 난관이란 말이다. 교수를 속으로 원망하며 나는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 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누군지를 알겠기만 한 사람은 까마득한 후배들. 역시 안 되겠다는 생각에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익숙한 얼굴이라고는 나와 비슷한 표정의 그 아이뿐이었다. 나에게는 익숙한 사람이지만, 그에게는 익숙하지 않을 나라는 사람에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선택지가 없었다. 수업이 끝난 후 나는 그 아이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 아이는 약간 곤란한 얼굴로 손목에 걸린 카메라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 저기…, 혹시 아직 조 없으시면… 저랑 같이 하실래요?
이 진부한 첫 문장. 이 뻔한 클리셰. 어디선가 많이 본 패턴이다. 이런, 방구석에서 드라마 보는 걸 그만둬야 하는데. 진부한 플러팅을 하는 조연1을 맡아 버렸다. 그러나 더 나은 말을 생각해내기에는 사고 회로가 얼어버린지 오래였다. 게다가 이건 혀가 발음한 소리라기보다도 심장이 펄떡이는 소리에 가까웠다. ‘제 멘트가 구리네요’라고 하며 뱉어버린 말을 회수할 수는 없으니 나는 뭐라도 해야 했다. 긴장한 얼굴을 숨기려 멋쩍은 웃음으로 ‘나는 이상한 사람이 아닙니다’를 표현하려 애썼다. 파르르 떨리는 눈가와 입꼬리에 마그네슘 좀 챙겨 먹을 걸 후회하면서. 그 아이와 눈을 맞췄다. 바로 앞에서 마주한 그 아이는 단단한 심지를 가진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눈이 커지더니 입이 열렸다.
― 어어, 네 좋아요.
조금 당황한 듯 보였지만 선뜻 그러하마 대답하는 음성에 나는 쾌재를 불렀다. 다행히 그 아이도 수업에 아는 사람이 없는 게 맞는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친해지기보다는 상징처럼 남겨두고 싶던 아이였는데(나의 나른한 목요일 오후여!), 이렇게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다면 친해져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거절당할까 미리 기대를 저버렸었는지도 모른다. 소심한 내 인생에서 역사적으로 남을 용기였다.
과제는 주어진 사진의 촬영 방식을 분석하는 것이었던가. 아무리 작품을 보아도 그것의 촬영 방식을 떠올려 낼 수 없었던 나는 그 아이의 능력에 많이 의존하였다. 손목에 카메라를 달랑달랑 걸고 다니거나 목에 무거운 카메라를 몸에 두르고 다니던 그 아이는 역시 사진에 박학다식했다. 이건 어떤 렌즈를 사용했고, 얘는 심도를 깊게 찍었다나 뭐라나. 수업시간에 겨우 들어본 용어들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사진에 무지한 예술이론 전공자라니 스스로 부끄러웠다. 그러면서도 생각했던 것보다 더 똑똑한 그 아이의 모습에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었어’라는 뿌듯함도 들었다. 내가 품었던 기대만큼 그 아이는 멋진 미지의 타인이었다.
과제를 위한 몇 번의 만남이 이어졌다. 곁에서 지켜본 그 아이는 역시나 계속해서 궁금증을 자아내는 사람이었다. 자기 얘기를 잘 하지 않았고, 내키지 않는 질문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화제를 타인에게 돌리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나 역시 그 아이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사적인 질문은 최대한 피하였지만, 조금 더 친해지자 마침내 호기심이 목구멍에서 터져 나왔다. 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하며 그 아이에게 대놓고 물어보았다. 왜 사진을 좋아하느냐고. 그 아이는 늘 카메라와 함께였기에 나는 그 아이가 사진을 좋아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 나는 사진은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
뭐라고? 그렇게 카메라를 주구장창 들고 다니면서 어째서 사진을 좋아하지 않는 걸까. 그 아이에게 배신을 당한 기분이었다.
― 그럼 카메라는 왜 맨날 들고 다니는 거야? 카메라를 안 가져오는 날이 없었던 것 같은데….
― 아, 카메라를 좋아하는 거지 사진 자체를 좋아하는 건 아니야. 카메라가 작동하면 사진이 나오는 것일 뿐이지. 그냥…, 카메라는 기계여서 좋아.
응? 그게 무슨 말이지?
― 이것 봐. 필름을 감고, 뷰파인더를 들여다보고, 찍고 싶은 장면을 정한 다음, 셔터를 누르면 철커덕. 그러면 그 순간에 필름에 빛이 들어오고 상이 맺혀. 셔터를 눌렀을 때 필름에 잠깐 빛이 들어오게 했다가 다시 빛을 막는 거지. 그 복잡한 기계적인 과정이 순식간에 일어나고 그렇게 한 장의 사진이 찍히는 거야. 너무 멋지지 않니! 철커덕 소리가 울리는 것도 그렇고!
그 아이도 밝은 목소리로 말을 우다다다 내뱉을 수 있구나. 그 모습이 낯설면서도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모습이 그 자체로 사랑스러웠다.
지금 와서 추측하건대 늘 그 아이의 손목에 매달려 있던 카메라는 작은 필름 카메라였던 것 같다. 지익 필름을 감고, 감도를 맞춰두고 노출과 셔터스피드와 심도와 초점을 조절한 뒤, 철커덕 찍어내는 수동 필름 카메라. 작지만 내구성 좋은 튼튼한 기계. 그런 카메라가 그 아이가 가장 애정하는 것이었을 테다. 그 아이는 어딘가 체계적이고 정합적으로 맞물리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래서 철학을 전공으로 선택했고, 논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 듯 기계 부품이 연결되는 것을 사랑했다. 그리고 내 짐작으로는 사진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했던 그 아이는 역시 사진을 사랑했던 것 같다. 수업 시간에 수업을 듣지 않고 사진을 편집하던 것도, 사진 작품을 분석해내던 것도 모두 사진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아이 자신도 나중에는 깨달았으리라.
나는 그해 가을을 그 아이와 함께 보냈다. 기껏해야 한 학기였지만. 누군가를 알게 됨으로써 한 계절이 더욱 풍부해질 수 있다니. 이 시기를 지나지 않은 나에게 누군가 이런 말을 한다면 콧웃음을 쳤을지도 모른다. 그정도로 이상하리 만큼 낭만적으로 남아 있다. 함께 과제를 한 것 말고 더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면, 별일은 없었다. 나는 그 아이의 반짝이는 눈빛을 닮고 싶었고 가랑비에 옷 젖듯 그 아이와 카메라와 사진의 매력에 스며들었다. 친해지고 싶은 마음을 넘어서 그 아이가 좋아하는 것에서 느끼는 기쁨을 함께 감각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아이 옆에 있으면 나도 열정적이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되는 것만 같았으니까.
아무 이유 없이 끌렸고, 친해지고 싶었고, 마침내 가까워지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스쳐 지나가는 인연도 있다. 그 아이가 그해 나의 가을에 짧은 흔적을 남기고 퇴장한 것처럼 말이다. 졸업을 앞두고 권태로움에 빠져 지내던 나는 그 아이 덕분에 나만의 반짝거림을 찾고 싶어졌다. 그래서 휴학을 한 뒤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다. 거창한 나의 유일무이한 삶의 목적이랄 것을 찾지는 못했음에도 방황 그 자체가 필요했던 것이었노라 회상한다. 결과적으로 지금은 출근하기 싫어하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지만. 그때의 열정적인 방황이 없었다면 지금의 평온한 나도 없었을 것이다.
수업이 끝나고 내가 다시금 휴학을 선택하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그 아이가 학교를 잘 마쳤는지, 학교 바깥 세계 어디로 발걸음을 옮겼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왜인지 어디선가 카메라를 둘러멘 채 세상 곳곳을 누비는 그 아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손목에도 작은 육면체 하나, 목에도 멋있는 기계 덩어리 하나. 부품이 하나하나 연쇄적으로 교합되어 생산되는 이미지처럼, 그 아이가 찍은 사진들도 한 조각의 퍼즐이 되어 그 아이를 이루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