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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해 Jul 22. 2023

단정한 눈걸음

뽀드득과 푸욱 사이의 정도로

뽀드득,

그날 창백하게 빛나는 눈을 밟으며 너는 나에게 물었다. 너는 잃는 것과 잊는 것 중에 뭐가 더 무서운 것 같아?


나는 갑자기 웬 생뚱맞은 질문이냐고, 넌 가끔씩 그렇더라, 말하며 푸스스 웃었다. 살짝 얼어 있던 네 입꼬리가 잠깐 올라갔던 것도 같다.   

  

나는 늘 너의 진지한 질문을 놀리고픈 욕구에 시달렸다. 그리고 늘 그 욕구에 졌다. 머뭇거리다 왈칵 나와버리는 네 무거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저 그 무거움을 외면하고 싶었던 걸까. 확실한 건 나는 무거움에 무거움으로 답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는 거다. 그날도 평소처럼 떠오르는 대로 말을 툭툭 발치에 뱉었다.     


음 글쎄, 투욱, 잊으면 잊은 줄 모르니까 괜찮을 것도 같은데? 뽀드득, 그치만 잃은 것은 눈앞에 불행으로 떡 하니 남아 있잖아. 지이익, 난 그게 더 싫을 것 같아. 툭투욱.

    

나는 눈 위에서 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 어제의 눈이 깨끗하게 쌓여 있던 곳에 툭툭 끊어진 흔적이 남았다. 나의 대답을 들었을 때 너의 표정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눈에 젖은 신발 앞코가 축축이 시렸던 것 같다. 아직 완전히 얼지 못한 눈이 내 발길에 차이던 것처럼 네 질문도 나의 가벼운 대답에 차여서 밀려 갔나, 이제 와서 생각해본다.     


근데 그건 왜? 나는 여전히 발로 뭉쳐지다 만 눈덩이들을 툭툭 밀어내며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너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내가 그렇지 뭐, 이런 말 자주 하는 거 알잖아.     


너는 대답 전후로 네 목소리가 달라진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평소와 같이 높지도 낮지도 않은 네 음성은 가벼운 나의 대답과 함께 어디론가 날아갔나 보다. 단순한 궁금증이었다고 해명 아닌 해명을 하는 네 목소리는 늘 반 톤 정도 가벼웠다. 둔한 나조차도 그것이 개운함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너는 단 한 번도 네 질문에 대답을 내놓은 적이 없었다.     


그냥, 그냥이 뭐였을까. 그냥이라는 말에는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들어갈 수 있을까. 그냥 떠올랐기에 그냥이라고 답하는 건 정말 그것이 그냥저냥 별 볼 일 없는 일이었기 때문일까. 그저 내 실낱같은 기억에 기대서는 그냥이라는 말에 네가 숨긴 것이 무엇인지 도통 가늠할 수 없다. 그때 추궁을 해서라도 네 생각을 듣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하지만 그 대답을 들었다고 해서 바뀌는 게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냥이 그냥이었듯이 그때는 그때이다. 지나간 것은 돌이킬 수 없다.

     

이리저리 눈을 밀어 질질 끌어 걸어온 나의 신발 뒤로 회색빛 흙이 질척거렸다. 티끌 하나 없는 뽀얀 세상에 낙서하듯 더러워진, 가볍고 장난스러운 길이었다. 내 옆에서 함께 걸음을 맞춰온 네 발자국은 뽀드득과 푸욱 사이의 깊이로 일정한 구멍을 만들었다. 어떠한 질척함도 남기지 않고, 정확히 너의 발바닥 크기만큼의 흔적만을 남겼다. 단정한 보폭마저도 참 너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처럼 눈이 쌓인 밤이면 정갈했던 네 발걸음을 떠올린다. 그때로 돌아가 하얗게 쌓인 눈의 표면에 설익었던 살얼음을 다시 밟고 싶다. 그 살짝 언 표면이 반사하던 시린 빛깔마저도 그리워진다. 나도 이제는 너처럼 걸을 수 있는데, 뽀드득과 푸욱 사이 그 알맞은 정도로. 너를 닮은 간결하고 소박한 발자국을 네 옆에 나란히 찍으며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바람 한 점 없이 적막하던, 그래서 우리의 발에 밟히는 눈의 부서짐이 소리의 전부였던 그날로 돌아간다면, 나는 네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까. 그때와 달리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그냥이라는 말 뒤에 숨겨진 침묵이 너의 대답이었을까. 그때 네가 삼킨 침묵이 지금의 내 침묵과 같은 것일까. 역시 너는 언제나 나보다 먼저 커버렸다.     


다만 너의 질문에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네 질문은 잘못되었다고. 잊는 것은 그 자체로 잃는 것이다. 심지어 내 안에서 잃는 것이기에,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보다도 무서운 일이다. 지금 나에게는 네 부재보다도 네가 기억에서 희미해져 가는 것이 훨씬 두렵다. 너를 잊는다는 건, 창백하던 눈길에 남긴 네 정갈한 발자국까지도 내 안에서 상실한다는 것이다. 나는 네 자취를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그때 이런 대답을 했으면 너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냥이라는 말로 감췄던 너의 무서움을 쓰다듬어 주고 싶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라도 너는 내 안에서 잊히면 안 된다. 나는 너를 더 이상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 기억 속에서라도 너는 그 단정한 발걸음으로, 뽀드득과 푸욱 사이의 알맞은 정도로, 그렇게 계속해서 걸어 나가라. 나는 영원히 네 표정을 볼 수 없겠지만, 너의 그 정갈한 걸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단단히 뒤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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