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해 Jul 22. 2023

단정한 눈걸음

뽀드득과 푸욱 사이의 정도로

뽀드득,

그날 창백하게 빛나는 눈을 밟으며 너는 나에게 물었다. 너는 잃는 것과 잊는 것 중에 뭐가 더 무서운 것 같아?


나는 갑자기 웬 생뚱맞은 질문이냐고, 넌 가끔씩 그렇더라, 말하며 푸스스 웃었다. 살짝 얼어 있던 네 입꼬리가 잠깐 올라갔던 것도 같다.   

  

나는 늘 너의 진지한 질문을 놀리고픈 욕구에 시달렸다. 그리고 늘 그 욕구에 졌다. 머뭇거리다 왈칵 나와버리는 네 무거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저 그 무거움을 외면하고 싶었던 걸까. 확실한 건 나는 무거움에 무거움으로 답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는 거다. 그날도 평소처럼 떠오르는 대로 말을 툭툭 발치에 뱉었다.     


음 글쎄, 투욱, 잊으면 잊은 줄 모르니까 괜찮을 것도 같은데? 뽀드득, 그치만 잃은 것은 눈앞에 불행으로 떡 하니 남아 있잖아. 지이익, 난 그게 더 싫을 것 같아. 툭투욱.

    

나는 눈 위에서 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 어제의 눈이 깨끗하게 쌓여 있던 곳에 툭툭 끊어진 흔적이 남았다. 나의 대답을 들었을 때 너의 표정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눈에 젖은 신발 앞코가 축축이 시렸던 것 같다. 아직 완전히 얼지 못한 눈이 내 발길에 차이던 것처럼 네 질문도 나의 가벼운 대답에 차여서 밀려 갔나, 이제 와서 생각해본다.     


근데 그건 왜? 나는 여전히 발로 뭉쳐지다 만 눈덩이들을 툭툭 밀어내며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너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내가 그렇지 뭐, 이런 말 자주 하는 거 알잖아.     


너는 대답 전후로 네 목소리가 달라진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평소와 같이 높지도 낮지도 않은 네 음성은 가벼운 나의 대답과 함께 어디론가 날아갔나 보다. 단순한 궁금증이었다고 해명 아닌 해명을 하는 네 목소리는 늘 반 톤 정도 가벼웠다. 둔한 나조차도 그것이 개운함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너는 단 한 번도 네 질문에 대답을 내놓은 적이 없었다.     


그냥, 그냥이 뭐였을까. 그냥이라는 말에는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들어갈 수 있을까. 그냥 떠올랐기에 그냥이라고 답하는 건 정말 그것이 그냥저냥 별 볼 일 없는 일이었기 때문일까. 그저 내 실낱같은 기억에 기대서는 그냥이라는 말에 네가 숨긴 것이 무엇인지 도통 가늠할 수 없다. 그때 추궁을 해서라도 네 생각을 듣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하지만 그 대답을 들었다고 해서 바뀌는 게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냥이 그냥이었듯이 그때는 그때이다. 지나간 것은 돌이킬 수 없다.

     

이리저리 눈을 밀어 질질 끌어 걸어온 나의 신발 뒤로 회색빛 흙이 질척거렸다. 티끌 하나 없는 뽀얀 세상에 낙서하듯 더러워진, 가볍고 장난스러운 길이었다. 내 옆에서 함께 걸음을 맞춰온 네 발자국은 뽀드득과 푸욱 사이의 깊이로 일정한 구멍을 만들었다. 어떠한 질척함도 남기지 않고, 정확히 너의 발바닥 크기만큼의 흔적만을 남겼다. 단정한 보폭마저도 참 너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처럼 눈이 쌓인 밤이면 정갈했던 네 발걸음을 떠올린다. 그때로 돌아가 하얗게 쌓인 눈의 표면에 설익었던 살얼음을 다시 밟고 싶다. 그 살짝 언 표면이 반사하던 시린 빛깔마저도 그리워진다. 나도 이제는 너처럼 걸을 수 있는데, 뽀드득과 푸욱 사이 그 알맞은 정도로. 너를 닮은 간결하고 소박한 발자국을 네 옆에 나란히 찍으며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바람 한 점 없이 적막하던, 그래서 우리의 발에 밟히는 눈의 부서짐이 소리의 전부였던 그날로 돌아간다면, 나는 네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까. 그때와 달리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그냥이라는 말 뒤에 숨겨진 침묵이 너의 대답이었을까. 그때 네가 삼킨 침묵이 지금의 내 침묵과 같은 것일까. 역시 너는 언제나 나보다 먼저 커버렸다.     


다만 너의 질문에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네 질문은 잘못되었다고. 잊는 것은 그 자체로 잃는 것이다. 심지어 내 안에서 잃는 것이기에,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보다도 무서운 일이다. 지금 나에게는 네 부재보다도 네가 기억에서 희미해져 가는 것이 훨씬 두렵다. 너를 잊는다는 건, 창백하던 눈길에 남긴 네 정갈한 발자국까지도 내 안에서 상실한다는 것이다. 나는 네 자취를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그때 이런 대답을 했으면 너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냥이라는 말로 감췄던 너의 무서움을 쓰다듬어 주고 싶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라도 너는 내 안에서 잊히면 안 된다. 나는 너를 더 이상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 기억 속에서라도 너는 그 단정한 발걸음으로, 뽀드득과 푸욱 사이의 알맞은 정도로, 그렇게 계속해서 걸어 나가라. 나는 영원히 네 표정을 볼 수 없겠지만, 너의 그 정갈한 걸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단단히 뒤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물에서 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