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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mon LA Sep 02. 2023

치매노인이 마지막까지 기억한 한 단어

미국이민자들 저마다 사는 이야기

J할아버지는 90세다. 미국에 이민 온 지 50년이 넘으셨다. 이민 올 당시에 서울대 출신 엔지니어로 시민권을 표창장처럼 건네받았다고 하신다. 


미국은 모두가 알다시피 이민국이다. 아메리카 드림이라고 할 만큼 미국으로 이민을 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이민 조건은 까다롭고 벽이 높다. 할아버지처럼 엘리트 엔지니어나 IT 기술자는 예나 지금이나 대 환영이다. 비자도 쉽게 나오고 영주권이나 시민권도 심사가 까다롭지 않다. 


그런 기술이 전혀 없는 나는 영주권이 없을 때 J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부럽기만 했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무조건 기술을 배우리라 마음먹은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꼭 미국이민을 위해서가 아니다. 기술 없는 평민의 삶은 우여곡절이 많고 팍팍해지기 일쑤이다. 


J할아버지는 센스 있고 똑소리 나는 할머니와 결혼을 하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10살이 어리다. 미국에서 평생 사업을 하시며 70에 은퇴하셨는데 항상 나를 보고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얘, 너는 너무 어리다. 뭐든지 할 수 있다." 


할머니는 40대에 이민 와 알게 되었다. 50대에 들어서면서 나이가 많아 이제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도 할머니를 만나면 20대 청춘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어 신이 난다. 에너지 드링크보다 에너지를 주시는 분이다. 


종종 J할아버지 집에 놀러 가면 새로운 발견을 한다. 책을 좋아하셔서 집 안 여기저기 책이 가득 쌓여있다. 그건 책꽂이에 꽂을 수 있는 분량이 아니다. 방이건 거실이건 남는 벽마다 책들은 가로로 꽤 높은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특이하게 안방 침대 옆에는 외국어 서적들이 즐비했다. 일본어 소설도, 독일어 소설도, 프랑스어로 된 책도 있다. 


"할머니 이 책들은 뭐예요?"라고 물었더니

"아 그거 할아버지가 독학으로 공부해서 전부 읽으신 것들이야." 하신다. 


J할아버지는 독학으로 5개 국어를 하신다니, 미국에서 시민권을 표창장처럼 주는 이유를 이제야 명쾌하게 이해가 되었다. 생각해 보니 5,60년 전 당시에 무슨 어학 학원이 있었겠는가. 무엇이든 필요하면 스스로 학습하고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 J할아버지의 공부비법. (나도 이렇게 했었야 했는데...)


2년 전부터인가 J할아버지는 치매끼를 보이셨다. 찾아가면 총명하게 이름을 불러주면서 기억해 주셨는데 언젠가부터 눈을 피하신다. J할아버지에게 나는 기억에 없는 낯선 사람이 된 것이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기억에서 지워졌다. 


그러더니 한 달 전부터인가 아들과 딸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셨다. 기억하지 못하는 얼굴에 이름이 남아있을 리 없다.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는데 상대방이 친절하게 다가오면 눈빛은 피하시고 빙그레 웃어 주신다. 사람은 언어는 잊어도 차리던 '예의'는 자연스럽게 몸에 남나 보다. 


언젠가 치매가 걸리면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한 사람을 기억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J할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끝까지 할머니를 기억했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할머니 이름을 까먹고 만 것이다. 


"여보, 내 이름이 뭐예요?"라고 할머니가 물으시자 J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눈을 피하셨다.


"여보, 내 이름 까먹었어요? 내 이름 뭐냐고요?" 다시 할머니가 자신의 이름을 말해달라고 재촉하자 J할아버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빙그레 웃으며 소심하게 대답한다.


"여보?"(확인하듯 아주 소심하게)


할아버지는 어떻게 해서든 기억해 내려했지만 이미 뇌 안에서 모든 단어들은 떠나가고 한 단어만이 남았다. 그것은 '여보'였다. 90 평생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사용했던 단어였으리라. 마누라의 이름보다, 아들의 이름보다, 딸의 이름보다 많이 불렀던 그 이름.


J할아버지는 며칠 전 돌아가셨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이름도 까먹고 소중한 '여보'를 세상에 남긴 채 평안히 눈을 감으셨다. 


누구에게나 태어나는 순간 생년월일은 점점 멀어지고 죽음은 가까워진다. 거기에 예외는 없다. J할아버지는 이 미국이라는 멀고 낯선 땅에서 떠나는 순간 무엇을 기억했을까? 빙그레 웃으며 눈을 감으신 걸 보니 여보와의 소중한 추억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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