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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mon LA May 18. 2024

완전관해, 두 번째 인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암투병 일기

무엇에 쫓기듯 앞만 바라보고 살아왔던 시선을, 큰 병(암)을 통해 옆으로도 돌리는 지혜를 얻었습니다.



수술 후 림프생검(유방암에서 겨드랑이 림프절 전이 여부를 확인하는 방법) 부위가 달걀 크기만큼 부어오르고 피멍이 들고 통증이 계속되어 3주 후 예약이 되었던 외래진료를 일주일 당겼습니다. 수술 부작용이 아닐까, 체액이 아니라 피가 고였으면 어떡하지 걱정을 하면서 진료실 앞에서 기다렸습니다.


제 이름이 호명되어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는데 담당 선생님은 한참 동안 컴퓨터 화면을 주시하고 계시더니 저를 향해 "축하해요. 완전관해입니다. 왼쪽 가슴 2군데(암덩어리가 왼쪽 가슴에 2군데 있었음)도 림프절에도 암세포가 없어졌습니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조직 검사 결과가 오늘 나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해 갑작스러웠지만, 간절히 기다리던 소식이라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담당의사는 부어오른 림프절도 직접 확인하고 만져 보시더니 체액이 고이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차 나아질 거라고 하면서 "난민이야? 왜 이렇게 말랐어. 밥 좀 많이 먹어요"라며 농담도 하시면서 앞으로의 계획들도 대충 설명해 주셨습니다. 


지난 일주일 정도 겨드랑이 림프절 생검한 자리가 부어오르고 아파 불안한 마음으로 병원을 방문했는데 '완전관해'라는 결과를 들으니 어느덧 고통은 사라지고 미국에 있는 남편과 아이에게 빨리 전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너무 기뻐서 울 것 같아. 정말 그동안 수고가 많았어. 미국에서 암에 걸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죽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그 시간도 이제 다 지나고 이런 기쁜 날이 오네" 하며 함께 병원을 가 준 큰언니가 울컥해 내 손을 꼭 잡았습니다.


완전관해로 독하디 독한 세포항암을 더 이상 안 해도 된다고 하니 오랜 시간 악몽을 꾸다 깨어난 느낌이랄까, 그치지 않을 것 같은 폭풍과 비가 머진 느낌이랄까, 오랜 시간 어두운 긴 터널 속에서 언제쯤 밖으로 나가 빛을 볼 수 있을까 하는 막막함의 연속이었는데 그것이 오늘이라니. 기대하지 못한 순간에 간절히 원하던 것이 이루어져 기쁨의 표현도 머뭇머뭇 머릿속을 맴돌고 있기만 했습니다. 


암투병이 시작되면서 절망의 맛도, 고통의 맛도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이 더 이상 주어지지 않고 끝으로 치닫고 있는 것 같아 인생의 마침표를 잘 찍으려고 가족들에게 유서도 쓰면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막상 죽음 앞에 서보니, 정말 이 세상은 맨몸으로 왔다가 맨몸으로 가는 것이라는 것을 절감. 할 일이 겨우 가족들에게 남길 편지뿐이라니, 어떻게 생각하면 홀가분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허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함께 해왔던 가족들과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영화필름처럼 뇌리를 스치며 흘러갔습니다. 


'더 사랑할 걸, 더 감사할 걸, 더 너그럽고 친절하게 대할걸......' 하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그렇게 빡빡하게 살 필요가 있었나 싶고, 남편에게 대단한 일도 아닌데 그렇게 화내고 짜증 내며 논쟁할 필요가 있었나 싶고, 아이에게 높은 기대감으로 그렇게  스트레스를 줬어야 했나 싶어 집니다. 


그런데 완전관해로 제2의 인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거의 환생한 기분이 들더군요. 물론 앞으로 방사선 치료와 표적항암 치료가 12회(3주에 한 번) 남긴 했지만 유방암 3기 말 판정을 받고 절망했을 때의 심정을 생각하면 이것은 그냥 신이 주신 기적입니다. 


100세 넘게까지 현역 의사로 일했던 다나카 요시오 의사는 "병, 특히 큰 병은 성실하게 마주하면 건강한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주고 그로 인해 많은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정말 무엇에 쫓기듯 앞만 바라보고 살아왔던 시선을, 큰 병을 통해 옆으로도 돌리는 지혜를 얻었다고나 할까요. 너무나 당연시 취급했던 미래, 향후, 내년, 내일, 앞으로, 이런 단어들이 이제는 골동품처럼 그저 소중하게만 생각됩니다. 같은 나인데 암투병은 '오늘'이라는 시간을 다른 태도로 대하게 해 주었습니다. 





완전관해(Complete Response, CR)라는 뜻은 암치료 판정 기준을 나타내는 용어의 하나입니다. 세계보건기구에서 임상적으로 계측, 평가 가능한 병변이 사라지고, 새로운 암세포가 보이지 않는 상태가 4주 이상 지속된 상태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완전반응이라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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