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는 1990년에 태어난 외동이다. 요즘 친구들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외동인 아이들이 거의 없었다. 시작부터 꼰대스러운 발언을 해서 유감이다. 하지만 '라떼는 말이야~'라는 추임새보다 적절한 멘트가 떠오르지 않았다(혹시 내가 꼰대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면 그건 오해가 아니었음을 순순히 인정한다. 나는 젊은 꼰대가 맞다).
요새는 영어 유치원이나 국제 학교 같은 시설이 많아졌다. 어릴 때부터 영어를 배우는 게 당연한 분위기랄까. 아마 영어 이름도 하나씩 갖고 있다지? 하지만 우리 때는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수업에서조차 나는 외동의 소외감을 느꼈다.
가족을 표현하는 문장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남자형제는 브라더(Brother), 여자형제는 씨스터(Sister).
“자! 한 명씩 자신의 형제관계를 영어로 말해보세요”
선생님은 우리 모두에게 발표를 시켰다. 교실에는 40명이 넘는 아이들이 있었고, 맨 앞자리에 앉은 친구부터 어설픈 영어를 시작했다.
나는 점점 긴장했다. 외동은 영어로 뭐지? 그건 왜 알려주지 않는 거지? 내가 기대할 수 있는 행운은 단 하나. 내 앞에 외동인 친구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명만 있으면 된다. 그럼 그 얘만 따라 하면 된다. 기대반 걱정반으로 아이들의 말소리에 집중했다.
키가 크지 않았던 탓일까. 나의 순서는 생각보다 금방 다가왔다. 안타깝게도 내 앞에는 단 한 명의 외동아이도 없었다. 평소 질문하기를 극도로 꺼리는 나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있지도 않은 브라더와 씨스터를 지어내면서 말하고 싶진 않았다.
“선생님 저는 외동인데...”
나는 작지만 조금은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은 사소한 무언가를 깜박한 사람처럼 칠판으로 돌아갔다. 아마 우리 외동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겠지. 하얀 분필을 쥔 선생님의 손이 빠르게 움직인다.
I have no brothers or sisters
(나는 남자형제도 여자형제도 없습니다)
용기 내어했던 질문에 처량한 답변이 돌아왔다. 아무도 없다는 말을 이렇게 길게 해야 된다고? 초록 칠판에 적힌 문장을 살짝은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only child라는 짧고 명쾌한 표현이 있었다).
당시 한 학급의 학생수는 40명보다는 많고 50명보다는 적었다. 평균값으로 대략 45명이라고 치자. 이 중 외동은 겨우 두 세명이었다. 수치화하면 대략 4~6%. 설문조사를 하면 나오는 '기권' 혹은 '기타'의 비중이다. 찬성도 반대도 아닌 영역.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비율. 한 마디로 우리는 극소수 집단이었다. 영어 교과서에도 '나는 외동입니다'라는 예시문을 본 적이 없다. 한 차례 업그레이드 했다는 7차 교육과정에서도 이런 수모를 당하는데, 6차 교육과정으로 배운 외동인들의 설움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무남독녀 외동딸은 한국 드라마의 잘못된 이미지 조성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부류다. 이들은 계단이 있는 2층 집에 살며, 방 안에는 각종 인형이 넘쳐나고, 옷장에는 알록달록한 공주 드레스가 줄지어 걸려있어야 한다.
초등학생 때 같은 반 친구를 집에 잠깐 데려온 적이 있다. 집안을 휙 둘러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네가 더 좋은 집에 사는 줄 알았어”
악의는 없는 말이었다. 친구의 말투에는 꼬임이 없었다. 다만 의외라는 표정만 있을 뿐. 하지만 화자에게 나쁜 의도가 없다고 청자의 기분이 나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친구의 말에 나는 꽤나 큰 머쓱함을 느꼈다. 그 아이는 나를 왜 그렇게 오해했을까? 단지 내가 외동딸이라서? 그 뒤로는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지 않았다. 이 사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이없는 프레임으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 친구들은 나를 특별하기 보기도 특이하게 보기도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의 호기심. 나의 외동 생활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언니가 입던 옷을 물려받지 않아서 좋겠다고 하는 친구들은 있었지만, 집에서 혼자 놀면 심심하지 않냐고 걱정하는 이는 없었다. 사람은 원래가 타인의 인생에는 관심이 없는 법이니까. 나 역시 형제가 있는 그들의 일상에 큰 궁금증은 없었다.
몇 번의 졸업을 거치고 학교라는 공간이 어색해질 무렵이 되었다. 듣자 하니 요즘은 한 반에 애들이 20명 정도란다. 겨우 스무 명? 나 때의 절반이다. 우리나라 인구 부족 현상이 피부로 체감되었다. 이보다 더 놀라웠던 건, 그중 많게는 절반이 외동이라는 것이다(물론 지역별로 차이는 있겠지만).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할 시간이 흐르자 비주류였던 외동이 주류가 되었다. 살다 보니 외동이 대세가 되는 날도 있네.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근데 정말 대세가 되기라도 한 걸까? 갑자기 나의 외동 인생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겼다.
"외동으로 자라서 어땠어?"
20대 후반을 넘기고 30대를 맞이하는 시점부터 이 질문이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이제 와서 나의 어린 시절을 왜 궁금해하는 걸까. 이유는 크게 3가지였다.
첫째, 그들은 부모가 되거나 부모가 될 나이가 되었고
둘째, 그들은 자식을 한 명만 낳거나 낳을 예정이며
셋째, 그들은 외동으로 자라지 않았다.
"별로 좋지 않아"
예상밖의 대답에 질문자들은 하나같이 놀라는 표정이다. 답변에 대한 근거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유를 줄줄이 덧붙였다. 이젠 놀람을 넘어 당황하기까지 한다. 지금까지 아무도 물어봐주지 않았던 외동의 삶. 그 소수의 인생을 묻는 물음이 고팠던 걸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의 이야기를 쏟아부었다. 거침없는 속사포식 언행에 그들의 표정이 오묘해진다. 생각이 많아 보인다. 내가 속 시원하게 내뱉은 말이 그들에게는 따끔한 자극이었나 보다. 샤워기에서 나오는 차가운 물줄기가 살갗을 따갑게 만드는 것처럼.
외동에 대한 긍정적 신호를 기대한 그들에게 나는 조금의 입바른 말도 해주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나의 한 마디에 누군가의 인생이 달려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식이 있어야 한다면 한 명만 낳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 친구에게는 무자식의 삶을 추천하기도 했다. 너희가 외동의 서러움을 알아? 키우는 게 힘들까 봐 그런 거라면 아예 낳지를 말아라! 삼신할머니가 옆에 있었다면 아마도 내 등짝이 남아나지 않았을 것 같다.
구토를 하듯 속에 있는 말을 게워냈다. 속이 비워지니 생각이 많아졌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말할 정도로 나의 외동 인생이 별로였나? 형제가 있었으면 뭔가 달라졌을까? 나와 똑같은 외동으로 자라온 회사 동기 언니는 아이를 한 명만 낳을 거라고 했다.
"외동으로 키우려고?"
나는 놀라며 물었다. 동기 언니는 자신이 외동으로 자란 게 좋았다고 했다.
순간 멍해졌다. 세상의 모든 외동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구나. 그렇다면 나는 왜 이렇게 외동의 삶을 폄하하는 걸까. 인지하지 못한 장점이나 당연시 여기는 이점이 있는 건 아닌가. 외동으로 30년을 넘게 살아왔지만 사실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막연한 느낌과 감정을 표현했을 뿐이다.
이제는 스스로 묻는다.
"외동으로 자라서 어땠어?"
너의 지난 인생을 찬찬히 살펴봐. 정말 좋은 점이 없었어? 나쁘다고 생각하는 구체적인 이유는 뭐야? 예전에는 좋았지만 지금은 별로라던가, 그때는 싫었지만 지금은 괜찮다던가 하는 것들. 이제 와서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을 떠올려서 무엇하겠냐만은... 30대 중반이 된 지금, 진짜 어른이 되는 길목 앞에서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혼자이기에 내가 지닐 수 있던 좋은 면모를 칭찬하고, 혼자였기에 내가 가질 수밖에 없었던 단점을 인정하는 시간.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과거를 복기하려 한다. 이 글은 외동의 삶을 궁금해했던 질문자들에게 남기는 답변이자, 부모님에게 전하는 소심한 고백이자, 나에게 건네는 위로와 응원이다. 더불어 나와 같은 외동인들에게 조금의 공감을 받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