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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독자 Jul 07. 2024

외동은 셀프입니다

혼자서(만) 잘해요


외동들이 가장 싫어하고 억울해하는 말이 ‘외동 같다’는 말이다. 외동은 독단적이고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그런 말을 들으면 혹시 내가 잘못 행동한 건 아닌지 반성한다. 나도 모르게 외동의 의미를 사람들의 정의에 맞추고 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외동이 있다. 첫째 같은 외동, 막내 같은 외동. 위로 아무도 없으니 첫째도 맞고, 아래로 아무도 없으니 막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럼 외동은 두 가지 성향을 다 가졌을까? 대게 내가 본 외동들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진 경우가 많았다.


흔히 말하는 외동티가 나는 부류는 막내 같은 외동이다. 이들은 사랑스럽고 천진 난만하다. 다만, 손이 많이 가는 타입이다. 부모님의 전적인 관심과 보살핌으로 자란 경우가 많다(대부분의 부모님이 자식을 사랑으로 키우겠지만 더욱 각별하다는 의미에서 ‘전적인’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네가 외동이었어?” 하며 놀라는 대상은 첫째 같은 외동이다. 한데 내가 봤던 외동들은 대부분 첫째의 모습을 보였다. 나도 굳이 선택하자면 이쪽에 가까운 편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동생이 있지 않냐는 질문을 하곤 했다. 나는 외동과 첫째의 결이 조금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이 부류의 외동들은 부모님의 적당한 방생 속에서 자란 경우가 많다. 이들은 의지하지 않음으로써 의젓해진 아이들이다.




외동은 집안에 벤치마킹 할 대상이 없다. 학교 준비물을 챙기는 비법을 알려줄 언니도, 숙제를 도와줄 오빠도 없다. 물론 저런 언니, 오빠들은 전생에 덕을 쌓아도 만나기 힘든 유니콘 같은 존재다. 그 정도는 외동인 나도 안다. 그러니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구상의 동생들은 너무 억울해하지 않아도 된다. 정말 어쩌다 한번 ’이 인간이 뭘 잘못 먹었나? 왜 잘해주지?‘싶은 순간조차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물론 처음에는 부모님이 알려주신다. 다만, 몇 세대 차이 나는 어른에게 배우는 것과 또래를 보고 익히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수학문제를 풀다 막히는 부분을 만난 순간을 떠올려보자. 선생님께 물어보는 것보다 같은 반 친구의 설명을 듣는 게 더 좋을 때가 있다. 가끔은 또래의 가르침이 더 편하고 이해하기도 쉽다.


반대로 내가 누군가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지도 못한다. 몇 해 전, 회사 동기의 결혼식에서 신부의 여동생이 축사를 했다. 언니가 인생의 롤모델이며 항상 자랑스럽다는 훈훈한 내용이었다. 듣고 있는데 괜스레 부러움이 느껴졌다. 둘의 관계가 탐이 났다. 안타깝지만 집 안에서 내가 누군가의 롤모델이 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가정 안에서, 나에게는 멘토도 멘티도 없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누군가를 돌보거나 보살펴야 하는 순간이 없었다. ‘동생이 얼마나 귀찮은데! 외동이 편한 거야’ 이번에는 맏이들의 아우성이 들린다. 더구나 우리 집에는 반려동물도 없었다. 외동아이의 사회성 발달을 위해 기르는 경우도 있던데… 개를 무서워하고 고양이 울음소리를 싫어하는 엄마 때문일까? 반려동물의 보호자가 되어볼 기회도 없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탓에 나의 무언가를 나누는 행위가 어색하다. 반대로 상대방의 무언가를 나눔 받는 건 부담스럽다. 인간이 진화하며 꼬리는 사라지고 꼬리뼈만 남았다는데, 나에게 나눔과 공유는 마치 흔적만 남은 능력 같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지도, 받지도 않는 사람으로 자라고 말았다.


확실히 말하자면 이기주의는 아니다. 이런 행동이 남에게 피해를 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감동을 줄 거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는다. 가끔 뜻하지 않은 따스함을 받을 때, 나도 저렇게 온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일까? 독립한 인간일까, 고립된 인간일까.




나는 어릴 때부터 굉장한 물 애호가였다. 지금이야 편의점에서 생수를 쉽게 구하지만, 예전에는 돈 주고 물을 사 먹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런데 나같이 물만 원하는 아이가 있다니. 부모님이 다른 음료수로 협상을 시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물맛을 알아버린 딸 때문에 부모님은 항상 통에 물을 담아 다니셨다. 까탈스러운 자식 때문에 수고가 많으셨다.


성인 기준 1일 물 섭취 권장량은 1.5~2L. 내가 마시는 물의 양을 계산해보진 않았지만 권장량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자주 마신다. 물 애호가답게 어딜 가든 물부터 챙긴다. 밥을 먹으러 식당에 가도, 술을 마시러 술집에 가도, 심지어 카페에 가서도 물을 따로 마신다.


식당에 들어가면 손님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물통과 물컵이 테이블 위에 놓인다. 주문을 마치고 음식이 나왔는데도 물을 주지 않는다면? 그때는 직원에게 당당히 물을 요구해도 되는 타이밍이다.

“저희 물 좀 주실 수 있나요?“

그 질문에는 이런 답변을 들을 가능성이 높다.

”물은 셀프입니다“


식당과 달리 카페에서는 물을 찾는 손님이 많지가 않다. 그래서 한쪽에 물병을 두고 원하는 손님만 떠마시게 한다. 오래전 친구와 카페에 갔을 때의 일이다. 커피를 절반 정도 마시고 나니 입이 텁텁해졌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물을 찾기 시작한다. 역시나 구석에 물이 보인다. 곧장 일어나 생수를 한 컵 떠 왔다. 친구의 시선이 내 손을 향한다. 그리고 곧이어 이렇게 말했다.

“너 것만 떠왔냐?”


아차 싶었다. 친구를 챙기지 못했다는 사실에. 더 정확히 말하자면, 친구를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에. 나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아니.. 너도 마실건지 몰랐지“

지독한 변명이었다. 이렇게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나 물 뜨러 갈 건데, 너도 마실 거야?“




어릴 적 엄마는 가끔 나에게 ‘지밖에 모르는 기지배’라고 말했다. 나밖에 모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남을 생각해야 하는 범위는 어디까지지? 타인에게 피해만 끼치지 않으면 괜찮다고. 외동으로 자랐지만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이라고 자부했다. 그럼에도 한 번씩은 나만 생각하는 인간으로 보일 때가 있다. 솔직히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때도 있다. 내가 이해하는 이기주의의 범위가 남들과는 다른 걸까?


self는 ‘자아, 자신’이라는 뜻의 명사
selfish는 ‘이기적인’이라는 뜻의 형용사

내가 마실 물을 떠 온 건 self가 맞다.

그럼 내가 마실 물만 가져온 건 selfish인가? 아닌가?

정답과 오답은 없다. 호감과 비호감만 있을 뿐이다.


나는 외동인이 가질 수 있는 배려의 범위가 '셀프 물'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게 좋다는 것을 다 커서 배웠다. 누군가에게는 자연스러운 물 한잔. 나는 민망한 순간을 경험하고 나서야 체득할 수 있었다. 이런 것까지 하나하나 알려줘야 하나? 답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 그런데 정말 부딪히기 전까진 몰랐다. 부끄럽게도 그랬다.


외동은 셀프다. 부모님이 A부터 Z까지 다 챙겨주지 않는다. 오히려 강하게 키우기 위해 스스로 해보라고 권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혼자 하라는 것이 혼자‘만‘ 하라는 의미는 아니었을 거다. 매번 나에게 지적해 준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이제 머리가 아닌 손이 먼저 반응해 자연스럽게 타인을 챙기는 내가 다행스럽다. 앞으로도 희생과 베풂의 영역을 확장시키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겠다. 이 공부는 아마… 영원히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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