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슬프잖아”라는 엄마에게 전하는 파인애플의 비밀.
몇 주 전 파인애플을 한통 샀다. 온전한 나의 과일이란 흥분감에 집에 도착하자마자 껍질을 벗겼는데 영 맛이 들지 않았다. 레몬색의 파인애플을 하루 만에 다 먹고 며칠 뒤 다시 마트로 향했다. 이번 파인애플은 도마 대신 찬장으로 향했다. 빛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주방 한편에 위치한 곳. 날짜가 바뀔 때마다 파인애플의 색도 조금씩 달라졌다. 밑동의 노랑이 위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스치기만 해도 아플 것 같던 잎사귀의 시들함을 보았을 때 맛을 봤다. 맛이 훌륭했다.
우리 엄마의 기대 수명은 일흔 살이다. 일흔 살까지 살고 싶은 건지 그때 모든 것을 마감하고 싶은 건지는 모른다. 허나 이런 얘기를 할 때마다 엄마는 '일흔 살까지만 살고 싶어'라며 혹여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별다른 의료조치를 해야하는 상황이 된다면 어떤 것도 하지 말라고 말한다. 여러번 반복해 말한 덕분에 조금 마음이 상했던 나도 이젠 그 상황을 마주했을 때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을 거란 마음이 생겼다.
삶에 큰 미련이 없는 건 엄마뿐만이 아니다. 중학생 때쯤, 수업 시간에 어떤 주제를 발표하기 위해 검색을 하다가 장기 기증에 대한 기사를 봤다. 당시의 나는 장기기증 카드를 신청하기 위해 모든 정보를 작성했다. 큰 사고를 당하고 뇌사 상태에 빠졌을 때 내 장기를 사용해도 된다는 증표를 지니는 셈이다. 허나 불행 중 다행인지 미성년이라 부모의 동의가 필요했고 아득한 밤이기에 내일 해야지라는 생각으로 24살이 된 지금까지 잊고 지냈다.
누구보다 죽음에 쿨해 보이던 엄마는 다른 엄마를 위해 병원에 간다. 아빠의 엄마, 그러니까 할머니는 몇 년 전부터 병실 침대와 고모네 침대를 왔다 갔다 하신다. 당신의 힘으로 식사를 하거나 화장실을 갈 수가 없다. 내가 프랑스에 오기 직전 할머니의 병세가 악화됐고 이곳에 있는 1년 동안 할머니를 뵈러 한번은 한국에 돌아가야 할 수도 있단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할머니를 돌보는 건 다름 아닌 우리 엄마와 고모들이다. 이젠 단어를 내뱉기도 사람은 알아보기도 힘든 할머니를 위해 그들은 병원을 찾는다. 일흔까지만 살고 싶다는 우리 엄마는 아흔에 가까운 할머니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줄을 간신히 붙잡기 위해 온갖 수술을 받아들이는 그녀를 보며 또 다른 그녀는 어떤 마음일까.
파리의 한복판을 걷고 있을 때였다. 도로 쪽에 위치한 노상 카페에 주름이 살을 파고드는 듯한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팔짱은 낀 그녀는 눈은 감은 채 내리쬐는 파리의 햇살을 모두 받아들이고 있었다. 빨갛게 익어가는 그녀의 주름들 사이에선 생동감이 피어났다. 이때의 생동감은 노인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중력이 그대로 드러나는 연한 피붓결, 햇빛이 그대로 투영돼 흰색과 투명 색을 띠는 머리카락. 오직 그들만이, 오랜 시간을 보내온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생동감이었다.
한번은 왜 일흔까지만 살고 싶냐 물었고 엄마는 “할머니는 슬프잖아”라고 답했다. 일흔이면 인생을 즐기기에 적당하단 생각은 내 지레짐작에 불과했다. 그녀는 일흔 뒤에 닥칠 일들이 두려웠다. 엄마 주변의 일흔은 모두 슬픈 모습일까. 내가 본 생동한 노인은 그녀의 주변에 없었던 걸까. 평균보다 덜 살고 싶은 마음이 통달이 아닌 두려움에서 왔다니. 약간의 혼란에 더불어 더 넓은 세상을, 다른 모습을 보지 못하는 그녀에게 뜻 모를 노여움도 느껴졌다.
프랑스 사람들은 과일 냄새를 맡는다. 대부분의 과일이 비닐과 플라스틱으로 포장되어 있는 우리나라와 달리 이곳에선 하나하나 생김새를 보고, 냄새를 맡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고른다. 현재에 스며들고 싶어 하는 나도 그들을 따라한다. 좋아하는 품종의 사과 앞에 서서 어떤 사과가 가장 예쁜지 살핀다. 빨강이 짙을수록 맛은 좋겠지만 대부분의 과일은 냉장고에 들어가고 며칠 뒤 후식이 필요할 때 찾게 된다. 그러니 지금 당장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사과보단 향은 약할지라도 골고루 익어가는 모습의 사과를 고른다.
파인애플도 마찬가지다. 이걸 어떻게 들고 갈지 걱정이 될 정도로 싱싱한 녀석을 골라온다. 햇빛과 인사할 수 있는 자리에 그를 두고 매일 아침 상태를 살피며 냄새를 맡는다. 사과는 이틀이면 맛있어지지만 파인애플은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일주일쯤 흘렀을 때 노란색이 강해지고 잎사귀에 갈색이 겉돈다. 오늘의 향기는 어제보다 더 짙고 달콤하다. 싱싱함은 나를 만나기 전이 더 강했을지라도 파인애플 본연의 맛은 오늘 정점에 달한다.
엄마도 파인애플의 맛을 알까. 그녀도 파인애플의 원리를 알까. 살짝 흥분한 상태로 이곳의 할머니들은 그렇지 않다며 햇빛이 강하면 바닷가에 앉아 젤라또를 먹고 밤이 되면 마을의 펍에서 와인을 마신다고 내리 설명했다. 엄마는 “그래? 프랑스를 가야 할까?”라고 웃으며 말한다. 언젠가 그녀와 프랑스에 오게 된다면, 햇빛이 내리쬐는 정오에 카페로 향할 것이다. 그곳에서 햇빛을 받아들이는 시간이 얼마나 즐거운지 보여줘야지. 오후엔 마을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에 가야겠다. 제철 과일의 향기를 맡고 과일이 익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게 얼마나 달콤한 일인지 함께 누려야지. 나이 들어감이 이토록 생동한 일이라는 것을 그녀에게 알려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