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나비의 노래는 위로와 감동이 있다. 잔나비의 최정훈이 직접 작사, 작곡을 한다는 사실은 그들의 노래에 더욱 빠지게 되는 요소이다. 가사를 보면 마치 한 편의 시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여러 가지 상징적인 단어들을 통해 듣는 이 각자의 마음에 어떤 울림을 준다. 특히 '꿈과 책과 힘과 벽'이라는 노래는 제목만 읽어도 내 안에 무언가가 건드려지는 것만 같다.
개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슬픔이여 안녕'이다. 이 곡은 무언가 상실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느껴진다. 잃어버린 것이 사람인지 꿈인지 그 밖에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무언가를 잃어버리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에 대해서 공감과 위로를 해주는 곡이다. 이 곡에 대해서 최정훈도 "어른이 과거에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면 좋았겠다" 하는 마음에서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슬픔을 느낀다는 것에 대해 정신분석에서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클라인으로 대표되는 대상관계이론으로 설명해 볼 수 있다. 특히 두 자리 이론에서 우울적 자리라는 개념으로 '슬픔이여 안녕'을 읽어보려 한다. 혹자는 예술작품을 하나하나 분해해서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예술가도 비평가도 아니니까 괜찮다. 인간에 마음에 대해 궁금한 누군가가 딱딱한 이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작은 도움이라도 된다면 그거로 족하다.
슬픔을 느낀다는 것은? 1. 상실을 받아들임
♬ 이젠 다 잊어버린걸 아니, 다 잃어버렸나
♬ 슬픔은 손 흔들며 오는 건지 가는 건지 저 어디쯤에 서있을 텐데
도입부에서부터 상실을 말한다. 잃어버린 무언가와 함께 슬픔도 같이 오고 있다는 것처럼 느껴지는 가사이다.
과연 무엇을 잃어버렸길래 슬픔을 느낄까? 유아가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기까지는 많은 관문이 필요하다. 편집분열적 자리에서 우울적 자리로의 이동을 한 사람이 '슬픔'이라는 성숙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클라인은 인간의 마음에 두 가지 상태(정확히는 자리 or 위치)가 있다고 보았다. 먼저는 대상이 분열된 상태인데 이 마음상태 일 때는 대상을 천사 아니면 악마로 경험한다. 극단적으로 좋은 대상과 극단적으로 나쁜 대상이다. 대상에 대해 편집(망상)을 하고, 좋고 나쁜 대상으로 분열되어 있기에 이를 편집분열적 자리라고 한다.
두 번째 상태는 대상이 통합된 상태이다. 살아가다 보니 완벽하게 좋은 사람도, 완전한 악인도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중요한 것은 나를 만족시켜 줄 만한 완전하고도 이상적인 대상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상실을 받아들이면서 '우울해'진다는 점이다. 이를 우울적 자리라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유아와 엄마의 관계로 설명을 하는데, 사실 이런 모습이 성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본다. 어느 순간 대상이 완벽해 보일 때가 있다. 아이돌 가수를 볼 때, 사랑에 빠지게 될 때, 내 직업 분야에서 top에 있는 사람을 볼 때 등등.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안 좋은 소식(소위 나락이라고 하는)을 듣게 될 때 우리는 다른 사람 보다 더 큰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화와 평가절하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상실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 즉 우울적 자리로 가서 슬픔을 느끼지 않고 여전히 편집분열적 자리에 머문 사람은 이런 마음상태이다. 어떤 이유로든 대상의 부재를 겪은 경우에 "어차피 그 사람은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어", "내 인생에 그 사람은 없는 게 훨씬 나아", "어쩐지, 처음부터 별로였어"라고 하는 사람에게 슬픔이란 것이 없다. 증오와 비난만 있을 뿐이다. 이를 '조적방어'라고 한다. 대상 상실을 인정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기 때문에 이를 안 느끼려고 방어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고통을 오롯이 느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슬픔을 느끼는 것은 '능력'이라고 불릴 만하다.
그러나 편집분열적 자리라는 것이 극복은 되어야 하지만 유아기 때 필수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단계이긴 하다. 이때는 천사와 악마를 구별하는 능력을 발달해야만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나에게 도움이 되고 무엇이 나에게 위협이 되는지, 즉 좋고 나쁨을 구분하는 아주 본능적이고 즉각적인 판단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후에 우울적 자리로 이동했을 때 상실을 받아들이며 슬픔을 느끼는 것이 불가피하지만 우리의 삶에 어느 시기에는 진실보다 환상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슬픔을 느낀다는 것은? 2. 대상에 대한 관심(이타심, 배려심의 발달)
♬ 이봐 젊은 친구야 잃어버린 것들은 잃어버린 그 자리에 가끔 뒤돌아 보면은 슬픔 아는 빛으로 피어
물론 잔나비가 이타심이나 배려심이라고 말한 적은 없다. 그러나 전체 흐름에서 나의 개인적인 해석이다.
무언가 잃어버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좋은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살아가다 보면 나와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는 그의 말과 행동을 공감할 수 있다. 심지어는 공감하고 싶지 않아도,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그 마음이 느껴진다. 상처 입은 사람이 상처받은 사람을 공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 나는 나를 미워하고 그런 내가 또 좋아지고
물론 나 같은 사람을 마주할 때의 감정은 상황마다 다르긴 할 것이다. 나 같아서 공감돼서 좋을 수도 있고, 반대로 너무 나 같아서 싫기도 하다. 어쨌든 대상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는 것이 중요하다. 유아와 엄마의 관계를 다시 보자. 편집분열적 자리에 있을 때 악마인 줄 알았던 그 대상, 그렇기 때문에 파괴하려고 공격했던 그 대상이 사실은 내가 천사로 여겼던 사랑하는 엄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를 대상에 대한 통합이 이루어지며 우울적 자리로 이동했다고 본다. 그러면서 내가 공격했던 것에 대해서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나의 공격성 때문에 엄마가 다쳤으면 어쩌지? 괜찮나?' 하며 대상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아기를 키우는 사람들이 '아기는 진짜 지삐 모른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다. 아마도 육아에 지친 사람의 자조적인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런 '지삐 모르는' 존재가 부모와의 관계경험을 통해 점점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알게 되는, 상대방에 입장을 고려할 줄 아는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아기의 편집분열적 자리의 폭주를 견뎌 줄 좋은 대상 경험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말이다.
슬픔을 느낀다는 것은? 3. 죄책감
♬ 자꾸만 아른대는 행복이란 단어들에 몸서리친 적도 있어요
이 대목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행복이란 단어에 몸서리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나는 단번에 죄책감이라는 감정과 연결됐다. 왜냐하면 죄책감이라는 것은 '잘못했다'는 느낌과 '처벌받아야 된다'라는 생각이 지배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죄책감이 많은 사람은 소위 '행복기피증'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행복하다"는 것과 "벌 받아야 된다"는 것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내가 행복해지는 선택보다는 불행해지는 선택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그 사람의 원초적인 죄책감이 작동했다고 볼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 사업의 영역에서, 인생에서 뭔가 '삐끗'하는 선택을 하는 경우 처리되지 못한 죄책감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무의식적 선택이기 때문에 제삼자의 눈에는 '왜 저런 선택을 하지?' 하겠지만, 정작 본인 스스로는 그런 선택을 한 것을 '후회하는 형태'로 죄책감을 처리한다.
무시무시한 이야기이지만 물론 이 정도까지 갔을 때는 아주 깊은 죄책감이 오래도록 처리되지 않았을 경우이다. 유아의 입장에서는 나의 공격성으로 인해 대상이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책임감 나타난다. 그래서 대상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회복충동이라는 것이 생긴다. 이는 대상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고 구체적으로는 감사, 기쁨, 이해심과 같이 대상관계에 긍정적인 작용을 하는 충동이다. 결과적으로는 대상에 대한 '관대한 태도'를 견지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된다.
일상적인 표현으로는 '미안해'를 먼저 말할 수 있는 능력도 우울적 자리의 성취물이라고 본다. 연인 간에 싸웠을 때 누가 먼저 '미안해'를 말하느냐가 친구들끼리 대화의 주제가 되기도 한다. 대상의 고통을 좀 더 공감할 줄 아는 사람('싸우고 나서 얼마나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를 생각하는 사람)이 아마 먼저 사과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과 싸운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공격성을 막 쏟아내고 난 뒤에 밀려오는 후회감('내가 너무 심했나, 너무 심한 말을 했나'와 같은) 또한 이 맥락에서의 죄책감이다. 이렇듯 성인도 언제나 편집분열적 자리와 우울적 자리를 오가며 대상 경험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람은 좀 더 나은 차원으로 성숙해 갈 수 있다.
슬픔을 느낀다는 것은? 4. 인격적 성숙함
♬ 바람 불었고 눈비 날렸고 한 계절 꽃도 피웠고 안녕 안녕
♬ 구름 하얗고 하늘 파랗고 한 시절 나는 자랐고 안녕 안녕
이 마지막 가사에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는 것 같다. 인간관계에서 상실도 경험하고, 공격성도 표출해 보고, 후회도 하고 이런 눈비 좀 맞아봐야 조금 성장하는 것 같다. 그러니 처음부터 성숙한 사람은 없는 것이다. 많은 인간관계를 통해서 상처도 주고, 상처도 받고 다시 회복도 하는 과정을 겪은 사람만이 인격적인 성숙함을 성취할 수 있는 것 같다. 너무나 괴롭고 경험하고 싶지 않지만 말이다. '성숙한 인격을 줄 테니 이러한 고통을 다 겪어라'라고 한다면 어떤 누가 그 제안을 수락하겠는가.
정리를 해보면 슬픔이라는 것은 그것을 느낀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심리적 능력이다. 그것은 대상상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한 고통을 오롯이 직면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대상에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배려심과 이타심이 발달된 성숙한 사람이라는 방증으로도 볼 수 있다. 고대에는 예술가들만이 멜랑꼴리아라는 슬픔과 우울의 감정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들만이 자신의 내면세계에 침잠하여 그것을 오롯이 느끼고 작품으로 승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슬픔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보다 고차원적인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우울적 자리와 편집분열적 자리에서 '자리position'라는 단어를 썼다는 것이 하나의 포인트라는 것이다. 이것은 여타 발달이론처럼 편집분열적 자리에서 레벨 업해서 우울적 자리에 계속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생에서 두 자리를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보았다. 우리의 인간관계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사랑에 빠졌다가, 싸우고 욕했다가, 후회하고 사과하고 회복되고 등등 관계에서 지지고 볶고 하는 게 인간사 아니겠는가 싶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론가들 중에서도 클라인에 이론을 너무 부정적이라고 비판한 관점도 존재한다. 아마 글을 읽는 분들도 이런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인간은망상(편집)증 아니면 우울증이란 거야?"라는 의문 말이다. 이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또 많은 지면이 필요하기에 간단히 말하자면 우울적 자리 이후의 상태도이론적으로 존재한다. 이는 추후에 다뤄보겠다. 물론 우울감, 죄책감도 모두 극복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누구보다 사람 사이의 사랑이 중요하다고 본 사람이 바로 멜라니 클라인이다. 사랑이 얼마나 인간을 회복시키고 풍요롭게 하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인 것 같다. 이것은 우리도 삶을 통해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
우울감과 슬픔이 느껴질 때 그것을 너무 병리적이거나 심각하게 여기기보다는, 상실을 돌아보고 그 빈자리를 인정할 수 있게 된다면 꽃도 피우고, 구름은 하얗고, 하늘도 파랗게 한 시절 자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