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MTD Jan 21. 2024

오랜만에 다시

22년 5월 마지막 기록 이후로 약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좋은 일, 나쁜 일, 기쁜 일, 슬픈 일, 행복한 일, 절망적인 일, 다시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내가 써놓은 글들을 읽으니 그때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기록해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날을 위해 써놨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뿌듯하다. 이후에 또 오늘의 나를 칭찬하기 위해 기록을 남겨보려 한다.

22년 4월, 5월부터는 다시 일상으로 복귀를 준비했다. 그 기점은 나 혼자서 운전이 가능한 순간이었다. 마비라는 증상을 겪은 사람으로서  '혼자서 운전이 가능하다'라는 말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침대에서 일어나기, 씻기, 옷 입기, 밥 먹기, 신발 신기, 차 문 열기, 안전벨트 매기 ... 손가락이 덜덜덜 떨리긴 해도, 모든 동작이 만족스럽진 않아도, 보는 사람한테 일일이 설명해야 된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혼자서 어느 정도 생활이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서류를 제출하고, 면접을 보고 최종 합격을 했다. 파트타임이긴 해도 기쁜 일이었다. '그래도 좋은 복귀의 시작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이런 순간이 올까 봐였다. "업계 특성상 남자가 많지 않은데, 나보고 힘쓰는 일을 도와달라고 하면 어쩌지? 그러면 '아 제가 길랑바레 증후군이라는 희귀한 병에 걸렸었고, 팔이 아직 회복 중이라 힘이 약해서 도와드릴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모두를 당황스럽게 만들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있었다. 

물론 그런 순간은 찾아왔다.  같이 세미나를 듣는 중에 '00샘 여기 정수기 물통 좀 갈아줄 수 있어요?'라는 부탁을 하셨다. 이때 나는 결정해야 했다. 남자답게 '네,  도와드리겠습니다!'라며 번쩍 생수통을 들어 올리거나 '아, 제가 지금 팔 힘이 약해서 못 도와 드릴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라고 거절해야 했다. 그런데 나는 둘 중 하나가 아닌 '아 네네 근데 지금 제가 팔이,, 일단 될지 안 될지 모르겠는데,,'라는 혼잣말 비슷한 어정쩡한 답변을 하며 나의 회복 속도를 믿어보는 결정을 해버렸다. 다행히 물통은 들어 올려졌고 그 순간은 무사히 지나갔다. 그때 느낀 내 기쁨의 무게는 물통의 무게 이상이었다. 

그리고 여름철에는 유난히 얇은 팔뚝이 많이 신경 쓰였다. 전신거울에 비친 반팔을 입은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쉬는 동안 움직임이 없고 힘을 줄 수가 없으니 근육이 다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근육이 빠지기 이전에는 그나마 근육과 지방의 밸런스라는 게 있었던 거 같은데, 과체중에 근육이 없는 몸은 너무 별로였다. 그래도 다시 일상을 회복한 것에 감사하며, 가을이 오길 기다리며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지냈다. 그래서 이때부터 하고 싶었던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요가를 시작했다. 

요가 또한 안 되는 동작이 많긴 했지만 너무 재미있게 했다. 주 2회 정도로 5개월 정도는 했다. 회차를 반복할수록 안되던 동작들이 되고, 절대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자세들이 완성돼 가는 게 매우 성취감 있는 운동이었다. 예를 들면 쟁기 자세, 어깨 서기, 머리 서기 같은 자세를 완성했을 때는 만족도가 매우 높다. 몸의 중심과 밸런스가 잡히는 느낌이 들어 좋은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체지방 감량과는 상관이 없다.

그 다사다난한 일을 겪는 동안 대학원은 휴학 없이 지속했고, 22년 말로 대학원 박사과정은 수료를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놀랍다. 이것이 가능했던 첫 번째 이유는 코로나 때문이다. 코로나로 모든 수업은 온라인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병원이든 집이든 노트북만 세팅해 주면 수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이유는 교수님들과 동료 선생님들의 배려였다. 대학원에서 강의만 들어서는 학점을 이수할 수 없다. 발제와 학기 말 페이퍼 제출이 필수이다. 나의 증상과 상황을 아셨던 교수님들께서는 마감 기한을 연장해 주시거나, 내가 할 수 있는 과제로 대체해 주셨다. 세 번째로는 이 과제와 페이퍼를 작성할 수 있게 도와준 가족과 지인들 덕분이다. 수업 때마다 컴퓨터를 세팅, 로그인을 하여 수업을 듣게 해 줬고, 기말 페이퍼를 위해서는 내가 말하는 것을 다 받아서 타이핑을 해주었다(이건 제일 팔이 안 움직였던 21년 2학기 얘기지만). 감사한 나날들이었다.

23년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정리해 봐야겠다. 풀타임 근무, 새로운 공간, 수영과 마라톤... 회복, 변화, 도전, 실패 등 또 많은 순간들이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회복이 빨라지면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