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의 단상 공책 3
_자리
안녕하세요, 여러분. 각자의 시간 속에서 안녕하신가요. 각자의 ‘자리’에서 안녕하시냐고 여쭤보려다가 왠지 ‘자리’라는 단어는 어딘가에의 정착을 전제하는 말인 듯한 느낌이 들어서 각자의 ‘시간’ 속에서 안녕하신가요,라고 여쭤봤습니다. 삶이라는 게 꼭 어딘가에 정착하고 자리 잡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언젠가 팟캐스트 해보려고 끄적댔던 인사말 중)
_지하철 할아버지
출근 시간 복잡한 지하철이었다. 한 할아버지께서 눈을 지그시 감고 줄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시며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계셨다. 노래에 완전히 푹 빠진 모습이었다. 출근길 복잡한 지하철에서 마주치기는 힘든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대중교통에서 음악을 듣지만 어느 정도 습관적으로, 혹은 딱히 할 일이 없어서 듣는 편이지 않나. 특히 출퇴근길 대중교통에서 이렇게나 푹 빠져서 음악을 감상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문득 이 할아버지는 일상을 행복하게 보내는 분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잡한 사람들, 복잡한 일상 가운데서도 자신만의 세계를 챙길 줄 아는 분이니까. 부럽고 멋있었다.
_넘어진 날
버스에서 내리다가 크게 넘어졌다. 너무 아파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정차한 버스 밑에 발이 걸친 채로 넘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바퀴에 깔릴까 봐 너무 무서웠다. 계속해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허탕이었다. 그런 나를 보고만 있는 사람들의, 그 무심한 눈들도 무서웠다. 어찌어찌 몸을 일으켜 절뚝거리며 걷는데 난데없이 지나가던 택시 속 기사분이 나한테 욕을 하고 지나갔다. 불행은 언제나 한꺼번에 오는 법.
처음에는 그 짧은 시간 내에 내게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무섭고 서러워서 울었는데 나중에는 내가 싫어서 울었다. 버스 바퀴에 깔릴까 봐 공포에 떨던 순간을 겪고 나서 문득 소설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김멜라 작가의 ‘저녁놀’이라는 단편 소설 속 눈점이라는 인물은 버스에서 내리다가 문에 발이 끼여 몇 미터를 끌려간다. 눈점은 이후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당시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눈점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런데 비슷한 일을 겪을 뻔하고 나니까 그제야 눈점의 공포가 절실히 이해되었다. 그게 싫었다. 직접 겪고 나서야, 그제야 그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마음. 슬픔이야말로, 고통이야말로 가장 강한 감정이라 이야기하면서도 막상 내 슬픔이 아니고 내 고통이 아니면 일정 정도만 아파할 줄 아는 마음. 그런 마음을 가진 내가 너무 싫어서 울었다.
_문신과 주름
내 앞자리에 앉은 분의 손이 무심코 보였는데 손등에 무언가 빼곡했다. 문신인 것 같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얼기설기한 손주름이었다. 손의 주인은 한 할머니. 문신과 주름. 좀 닮은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일단 평생이라는 속성이 그러하다. 생기는 순간 평생 안고 가야 한다는 속성. 다만 문신은 자의로 새기고 싶은 대로, 새기고 싶은 때에 새기는 것이고 주름은 내 의지와 상관없는 모양으로 어느샌가 새겨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둘째로 문신과 주름 둘 다 ’나‘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닮았다. 문신이야 설명이 필요 없고 주름이 나의 표현인 이유는, 주름은 내가 보낸 수많은 세월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름은 세월없이는 만들어지지 못한다. 즉 주름은 세월의 증거다. 나이 들어감과 그것의 증거인 주름을 두려워하는 나인데 이런 생각이 들고 나니 조금 덜 두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