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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등대 Mar 10. 2024

어른들은 왜 술을 먹을까요?

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의 단상 공책 7


_준수의 대답

어른들은 왜 술을 먹을까요?라는 질문에 준수가 웃으며 답했다. “바보니까!“

준수는 웃으면서 10점 샷을 날린다. 맞아, 바보라서, 겁쟁이라서 마시는 거야. 알코올이라는 화학물질 없이는 솔직해지지도, 다정해지지도 못하는 바보라서. 혼자만의 힘으로는 살아지지 않는 약체라서 술의 힘을 빌려 살아가는 것이다. 술을 안 마시는 내 친구가 언젠가 말했다. “인생은 조금 취한 듯이 살아야 해.” 그 말이 진짜 매일 취하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역시 나는 바보라서 매일 같이 취해 산다. 어린 왕자가 만난 술꾼처럼.


부끄러움을 잊어버리려고 술을 마신다는 술꾼에게, 어린 왕자가 무엇이 부끄럽냐고 묻자 술꾼이 대답한다. “술 마시는 게 부끄럽지!” 어른이 되기 전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기억에도 없던 이 대목이 이제와서는 가장 뼈저린 대목이 되었다. 아무것도 못하고 술이나 마시는 자신이 부끄러워서 술로 그런 자신을 잊으려 한다는 술꾼이 너무나 익숙한 것은 왜일까. 답을 알지만 피한다. 피해도 피해지지 않을 때 또 술을 마신다. 부끄러우니까. 아무래도 너무 부끄러워서 오늘도 술을 사러 간다. 집 앞 단골 슈퍼에 갔는데 사장님이 반기며 말하신다. ”오늘은 일찍 왔네.“ 진짜 부끄럽다.






_어떤 오독


연습실 한가운데, 쿠션의 더러운 솜이 빠져나온 팔걸이의자에 앉은 MJ만이, 식모의 표현에 따르면, 산더미 같은 빚과 함께 남았다.

배수아, 「속삭임 우묵한 정원」 2화 중


나는 이 문장을 처음 읽을 때 “MJ만이 (…) 산더미 같은 빚 ’처럼‘ 남았다.”라고 오독했다. 필사를 하면서야 내가 이 문장을 오독했음을 깨달았다. 오독한 버전의 문장이 너무도 와닿아서 필사를 하고자 마음먹은 거였는데. 꿈의 전부를 잃어버린 채 방구석에 쭈그리고 있던 그때, 나는 내가 한 덩어리 빚으로 느껴졌다. 엄마의 어깨에 얹힌, 아빠의 등에 얹힌, 나아가 이 죄 없는 세상의 팔에 얹힌 한 덩어리 무거운 빚. 그 당시의 나를 어떤 말로도 설명하기 힘들었는데, 그리도 간단하게 한 단어로 설명이 되는 거였다. 빚. 처치곤란하고 막막한 존재인 나는 한 덩어리 빚과 같았다. 그 느낌을 여태 잊지 못해 이 문장을 제멋대로 오독했나 보다.







_요약

어쩌면 문제는 요약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은 너무 간단히 요약되는 경향이 있다. 어느 대학을 졸업했다,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다, 어떤 취미를 좋아한다. 이런 문장들은 그 사람을 너무 단순하게 보여줄 뿐 아니라 그 사람이 대학을 입학하고 졸업하기까지의 노력, 직장에서의 일상적인 스트레스, 취향을 형성하기까지의 이야기 등을 지나치게 요약해 버린다. 요약을 넘어 삭제에 가깝다. 조금 긴 이 문장은 어떤가. ‘줄곧 지방에서 공시 공부를 하다가 그만두고 서울의 작은 회사에 취직해서 자취 중이에요.’ 역시 너무 요약적이다. 이 사람의 노력과 좌절, 선택과 결심 등을 충분히 알아볼 수가 없다. 오래 붙잡았던 공시 공부를 그만두기로 결심한 날의 뒤숭숭함, 이 집 저 집 들락거리며 수도를 틀어보고 햇살의 방향과 월세를 따져보던 날들, 첫 상경을 위해 오른 기차에서의 긴장은 이 문장에서 삭제되어 버렸다.


나라는 존재를 간단명료하게 피력해야만 관심을 얻을 수 있는 세상이다. 자기소개서의 문장은 간단명료해야 하는 게 불문율이다. 짧은 숏폼 안에 나, 혹은 내가 가진 것을 짧고 빠르게 보여주어야 눈길을 끈다. 그런데 나는 자꾸 반감이 생긴다. 짧은 호흡의 것들을 보고 있으면 숨이 막힌다. 무언가 불안하다. 사람이 안 보인다. 너무 짧아서 그의 얼굴조차 잘 인식할 수 없다. 물론 우리에게는 요약된 문장 안에 숨겨진 것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짧은 문장만 반복되는 일상에 익숙해져 버리면 그 능력이 조금씩 퇴화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요약된 삶 안에 있는 분투의 시간을, 인간적인 고민을 보지 못하면 타인을 너무도 타인처럼 대하게 된다.


섬세함이 부재할 때 폭력이 발생한다고 믿는 나는 우리가 조금 더 긴 문장을 사용하면 좋겠다. 문장이 길어진다고 무조건 섬세해지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섬세해질 수 있는 장은 마련된다. 그래서 내가 결국 문학을 읽는 걸까. 문학은 존재에 대한 가장 길고 섬세한 문장이니까. “세상 사람들이 ‘외도를 하다 자살한 여자’라고 요약할 어떤 이의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2000쪽이 넘는 소설을 썼다. 그것이 『안나 카레니나』다.“(『정확한 사랑의 실험』) 문학을 읽는 일은 존재를 긴 호흡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연습하는 일이다. 요약되지 않은 긴긴 문장을 읽으면서 우리는 ‘나’와 ‘너’를 이해할 수 있다. 요약 없는 문장이 곧 ‘나’이고 ‘너’이고 우리의 삶이니까. ‘나’도 ‘너’도 삶도 대충 넘겨짚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그래서는 안되니까), 우리 모두 최대한 긴 문장을 쓰고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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