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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등대 Mar 02. 2024

안과에서 고흐를 처방받았어요

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의 단상 공책 6


_인공 눈물과 고흐

안과에 갔더니 눈이 너무 건조하다며 인공 눈물을 잔뜩 처방받았다. 그래, 역시 눈에는 눈물이 필요한 거였어. 늘 글썽여야 하는 거였어. 고흐처럼.


고흐는 예술가가 세상을 보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말을 믿었고 자신의 시야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는 어떤 시야를 가졌는가.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는 고흐의 시야를 카메라 기법에 담아낸다. 고흐의 1인칭 시야를 표현하는 화면은 늘 아랫부분이 흐릿하다. 마치 눈물이 차오른 것처럼. 고흐는 슬픔의 시야를 가진 사람이었다. 환각과 정신 발작을 반복하고 늘 우울과 고독 속에 있던 그가 말한다. “천사는 슬픈 이들 곁에 있고 때로는 병이 우릴 치료해요.” 누구보다도 슬픔을 지긋지긋해할 그가, 가끔은 건강을 회복하기 싫다고까지 말한다. 약간의 우울이, 약간의 광기가 예술의 원천이라는 (고리타분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시야를 지키고 싶을 뿐이다. 그가 슬픔의 시야를 지키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 시인의 글이 떠오른다.

시는 마음이, 기억이, 기쁨과 쓸쓸함과 절망이 일상의 하찮은 부산물이 아니라 세계의 중요한 구성물임을 증명하는 과정이라고, 슬픔과 분노와 고통을 질병으로 분류하려는 세계에 끝없이 저항하면서 역사를 일상으로 기록하는 일이라고,
신용목, 『비로 만든 사람』, 95 p

고흐는 슬픔이 일상의 하찮은 부산물이 아니라 세계의 중요한 구성물임을 알았다. 의도한 건 아닐지 몰라도, 그는 늘 슬픔을 질병으로 분류하려는 세계에 저항했다. 평생토록 고독해왔다고 고백하면서도,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어울리며 이야기 나누며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그는 끝내 슬픔을 놓지 않았으니까. 고흐는 늘 시야의 반을 눈물로 채웠고 나는 오늘 눈물을 잔뜩 처방받아 왔다. 눈이 건조할 때마다 눈물을 넣을 것이고 그때마다 고흐를 떠올릴 것이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눈에는 눈물이 필요하다. 우리는 눈이 촉촉해야 하는 존재다.’ 바싹 말라 뻑뻑한 수많은 눈들에 고흐 처방이 시급하다.





_엄마의 웃는 얼굴

엄마가 빵-하고 터져서 웃는 얼굴을 볼 때마다 기분이 묘해진다. 웃는 얼굴이 우는 얼굴과 너무 닮아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웃는 모습이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과 너무도 닮아서. 언젠가 내가 쓴 문장을 떠올린다. “웃음과 슬픔은 맞닿아 있다. 너무 많이 웃다 보면 눈물이 고이는 것, 가끔 웃는 얼굴과 우는 얼굴이 비슷해 보이는 것, 상대의 아픈 약점이 웃음거리가 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왜 큰 웃음은 큰 슬픔을 닮았는지. 왜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 되어버리는지. 왜 많은 시간을 함께할수록 이별의 순간은 더 고통스러워지는지. 어째서 세상 모든 극과 극의 것들은 동전의 양면처럼 정반대 방향을 바라보며 등지고 서있으면서도 허리께 아래에서 스리슬쩍 손을 맞잡고 있는지. 엄마와 같이 웃다가 점점 이상한 표정이 되어가던 이유는 이런 억울함 때문이었을까.





_아름다움에 대한 사적인 정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미적으로 ’예쁜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이란 곧 진실함이다. 진실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기만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우리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런 대사를 흔히 마주친다. ’정말 진실이 알고 싶니?‘ 혹은 ’진실을 감당할 수 있겠니?‘라는 식의 대사. 그 ‘진실’이라는 것은 늘 알고 보면 위험하고 잔인한 것이고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뻔했을 정도로 불편한 어떤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끝내 그 무시무시한 ‘진실’을 마주하기를 택한다. 그 광경이 바로 진실한 광경이고 기만적이지 않은 관경이다. 그것이 곧 아름다운 광경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볼에 커다란 총알이 박힌 채 고통스레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A가 말한다. ”괜찮아, 총알 따위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도 너는 예뻐.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해.“ 반면 B는 이렇게 말한다. ”총알이 박히던 순간의 고통, 그 총알을 내내 안고 사는 고통을 나는 도저히 알 수가 없고 총알 박힌 볼이 예쁘다고 말해줄 수도 없어. 그래서 나는 슬퍼. 그러나 너는 총알이 있어서 비로소 너이고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해.“


A는 그의 약점을 약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총알 따위 아무것도 아니야.’) 의도한 게 아니어도, A는 그의 고통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또한 총알이 약점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그 총알(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총알 따위 아무것도 아니야.’ - 그래도(총알-약점에도 불구하고) 난 너를 사랑해‘) A의 말은 기만적이다.


반면 B는 그의 약점을 인정한다. 총알이 그의 약점이며 그래서 예쁘지도 않다고 말한다. 또한 총알이 박히던 순간의 고통과 그 총알을 내내 안고 사는 고통을, 자신은 전혀 모른다고 고백한다. 잔인한 말들이다. 그러나 이 말들은 그와 B 자신, 누구도 속이지 않는 말이다. 또한 B는 덧붙였다. ‘그래서 나는 슬퍼’.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 타인의 약점(고통)에 괜찮다고 말해줄 수 없는 자의 고통은, 진실하다.(『몰락의 에티카』) 또한 B는 그의 약점을 애써 무시하거나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그의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너는 총알이 있어서 비로소 너이고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해.’) B는 자신을 포함한 누구도 기만하지 않고 사랑을 한다. B의 태도가 곧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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