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조금씩 추워지니 목이 가끔씩 따끔거리며 기침이 난다. 친정아버지는 겨울이 접어들 때쯤 석유곤로에 산초기름을 넉넉히 두른 프라이팬에서 두부를 지글지글 구우셨다. 아버지는 노릇노릇 구워진 따끈한 두부를 접시에 담아 막내딸인 내게 가장 먼저 먹으라고 주셨다.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유일하게 만드신 요리(?)이다. 처음에는 산초에서 나는 이상한 향이 싫어서 고개를 젓다가 이것 먹으면 기침도 안 나고 목도 안 아프다는 말씀에 조금씩 떼어먹다 보니 나중에는 고소하니 먹을 만했다.이렇게 먹게 된 산초 두부구이를 매해 쌀쌀함이 나를 찾아올 때쯤 그리워한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어느 날 직장상사분들을 모시고 점심을 먹으러 두부집에 갔다. 산초 두부구이가 메뉴판에 있어 먹게 되었다. 오랜만에 먹어 본 두부구이는 내게 진한 향기와 함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내가 어렸을 적 자란 고향에는 유독 산초나무가 많았다. 지금도 고향에는 산초 두부구이집이 많이 있어 가끔 고향을 방문할 때면 찾아가서 별미로 즐기곤 한다.
산초는 천초라고도 불리는 운향과의 낙엽활엽 관목이다. 녹갈색의 열매가 다 익으면 그 속에 있는 까만 씨가 밖으로 튀어나오게 된다. 이 씨를 기름틀에 넣어 기름을 짜서 먹거나 빻아서 향미료로 사용하였다. 산초기름은 호흡기 질환이나 면역력 강화에 도움을 주었고, 산초 열매는 장아찌를 담가 먹었다. 어릴 적 추어탕이나 비린 요리를 할 때 음식에 넣었던 향신료가 산초가루인 줄 알았던 것이 제피나무 가루임을 알게 된 것은 숲해설가 공부를 하면서였다.
산초나무와 제피나무의 차이를 배우긴 하였지만 식물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터라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다. 단지 산초나무잎은 어긋나고 열매가 줄기 끝에만 달려 하늘을 향하고, 제피나무잎은 대칭이며 열매가 가지 중간이나 끝부분에 달리고 땅을 향한다는 것 외에는. 하지만 이 또한 변종이 많다고 하니 지금 숲에 가면 잘 구분하지 못할 것 같다.
퇴직 후 조그만 땅도 있고 마음의 여유도 있어 이것저것 심고 싶은 꽃과 나무를 우후죽순으로 심었다.
이번에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 산초나무가 문득 심고 싶어졌다. 값도 비싸고 구하기도 어려운 터라 나무시장 여러 군데를 수소문하다가 10주를 구하였다.
나무는 식목일 전후해서 봄에만 심는 줄 알았는데 전문가가 뿌리가 활착 하는 데는 가을이 더 좋다고 하니 반신반의로 한번 심어 보기로 하였다. 단지, 곧 다가올 겨울이 걱정이 되어 붕대로 감아주어 건강하게 잘 살아주길 바랐다.
요즘 가장 좋은 것은 하고 싶은 것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몇 년 후에나 나무가 자라 열매를 맺어 아버지가 내게 두부구이를 해 주셨던 것처럼 내가 내 자식에게 두부를 구워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퇴직 후의 삶 속에서 내일과 상관없이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명언을 내가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 뿌듯하다. 이게 내가 나에게 주는 인생 2막의 새로운 의미다.
산초나무를 심으면서 엄마를 먼저 보내시고 쓸쓸해하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내내 아른거렸다. 살아계셨더라면 당신이 손수 이 나무를 심어주셨을 텐데... 그러다 힘이 들면 담배 한 대 피우고 또 심으셨을 텐데... 퇴직 후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인지 가끔씩 이렇게 문득문득 생활 속에서 과거로 가는 추억열차에 몸을 실을 때가 많다. 어느 가수의 노랫말처럼 내가 익어가는 것일까?(아직 늙는다는 표현은 하고 싶지 않다.)
이젠 그 그리움마저 사랑하련다. 내 살아있음의 특권으로 누려야겠다. 이 추억 또한 행복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