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익숙하다. 이번 가을여행은 관광보다는 쉼을 목적으로 했다. 숙소도 지난봄에 왔을 때 가성비. 가심비 측면에서 만족한 장소에서 오래 머물기로 했다. 유난스럽지 않고 가족단위의 관광객이 많은 숙소이다. 어쩌면 이러한 숙소가 마음속에 있었기에특별히 번거롭지 않은 마음으로 여행을 훌쩍 떠나올 수 있었다. 유난히 잠자리가 까다로운 짝꿍이지만 이곳만큼은 만족해한다. 조식도 간단하게 한식으로 해결해 주고, 저녁 식사도 주문예약하면 숙소에서 가능한 곳이다. 술도 한잔 할 수 있는 편리함, 거기에 팥빙수 맛집으로도 유명한 카페도 함께 있어 조용하고 아담한 이곳이 마치 내 집처럼 아늑하고 편안하다.
오늘은 억새가 장관을 이루는 용눈이오름으로 발길을 옮겼다. 지난봄에 왔을 때는 출입이 제한되었다. 2년 4개월의 자연휴식년제를 거쳐 7월 1일 다시 개방되었다. 자연휴식년제는 오름이 더 이상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탐방객의 출입을 제한해 자연적으로 식생이 복원되도록 하는 제도이다. 아마 방송에서 유명세를 타면서 발길에 치이고 움푹 패이며 몸살을 앓은 듯하다. 빨리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길 바란다. 우리들의 자연보호노력도 함께 해야 할 것 같다.
용눈이 오름은 유일하게 분화구가 3개이다. 봄, 여름에는 잔디가, 가을, 겨울에는 억새가 덮이며 인체의 곡선처럼 부드러운 능선이 유독 아름답다. 한가운데가 움푹 패어있어 용이 누웠던 자리 같다는 뜻을 담아 이름이 지어졌으며, 실제로 위에서 내려다보면 화구의 모습이 용의 눈처럼 보이기도 한다. 경사도가 완만해서 남녀노소 누구나 걷기에 편해 15분이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 멀리 성산일출봉과 우도까지 확연히 보이며 지난봄에 올랐던 다랑쉬 오름도 볼 수 있었다. 정상에 오르니 가슴이 틔이고 내 세상인 듯 맑은 공기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세 개의 분화구를 중심에 두고 한 바퀴를 여유 있게 산책하며 바빴던 마음자리도 내려놓았다. 하늘거리는 억새가 하늘과 맞닿아 내 마음을 전해 주는 듯했다.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걸었으니 잠시 목을 축이러 카페로 이동했다. 에그타르트가 맛있다는 카페이다. 노키즈존으로 되어있어 휴식을 취하러 오는 손님들에게 초점을 맞춘 카페라 작고 아담했다. 특별한 메뉴로 손님을 끌면서도 자기들만의 소신을 가지고 있는 젊은 카페였다. 우리도 젊음을 가장한 채 그 대열에 끼어 보았다. 따뜻한 에그타르트가 달콤하니 별미다. 조그만 창문과 앙징맞은 테이블등이 젊은 연인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카페의 시그니쳐 메뉴에흡족한 입맛을 다시고 다시 여유 있게 드라이브길에 올랐다. USB에 담아 온 익숙한 음악으로 낯선 도로를 달리며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인양 편안하게느껴졌다.
저녁식사가 숙소에 흑돼지 바비큐로 예약된 터라 점심은 고기국수와 보말죽으로 간단히 해결했다. 제주에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일은 바다를 보거나, 오름을 오르거나, 차를 마시는 일이었다. 바다내음을 맡으러 표선해변으로 발길을 옮겼다. 아름다운 바다물결에 거센 파도와 싸워가며 테왁을 맨 해녀의 삶을 느끼게 해주는 해변이었다. 해변가에 세워진 물질하는 제주 여인네의 돌비석에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한참 해변을 걸으며 바위에 걸터앉아 바다의 출렁임을 감상했다. 어딘가에 쌓여있을 누적된 피로들을 묵묵히 바다에 던져 버렸다.
가을경치를 보러 온 나들이기에 억새명소로 알려진 따라비오름으로 또 발길을 옮겼다. 이 오름도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봉우리가 매끄러운 등성이로 연결되어 한 산체를 이루고 있다. 말굽형으로 열린 방향의 기슭 쪽에는 이류구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비교적 최근에도 분출된 신선한 화산으로 판단되고 있다고 한다. 오르는 길이 나무계단으로 되어 있어 다소 힘은 들지만 정상에 올라가 보면 가히 오름 중의 여왕이라 할 만큼 아름답다. 워낙에는 초입 억새군락지가 아름답기로 유명했으나 다 베어져 원형 곤포 사일리지(마시멜로) 만이 나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정상 쪽의 억새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두 개의 오름을 걸으며 억새의 한들거림을 만끽하며 그들의 향연에 잠시 관객이 되어 주었다. 열심히 호응하며 손뼉 치고 아름다움에 한껏 환호했다. 넓은 제주에서 느껴지는 가을억새의 광활함과 의연함은 살아가는 동안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떠오르리라. 무리 진 초연한 아름다움이 나이 들어감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리라. 오름이 많은 가을제주는 억새가 온 도시를 은빛으로 장식하고 있었다. 풍요로움을 가득 안고 저녁노을이 지는 김녕해수욕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철썩이는 파도에 아랑곳없이 지는 석양을 배경으로 예비부부들이 웨딩촬영을 하고 있다. 풋풋하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그들의 행복함에 바라보는 내 얼굴에도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내 젊은 날도 거기 있었다. 밀려오는 파도에 쫓기듯 뛰어가는 신부를 멀리서 신랑이 양팔을 벌리고 가슴에 안았다.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보이고 든든해 보었다. 아름다운 바다와 나무가 되길 바라며 그들의 앞날을 축복했다. 어느새 석양도 어둠을 삼키고 검은 바위만이 하얀 백사장에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아무 사심 없이 걷고, 산책하고, 먹고, 마시다 보니, 아니, 벌써!라는 노래가사처럼 하루가 지나갔다. 이제 숙소로 돌아가 불판 위의 고기 한 점에 소주 한잔으로 아쉬운 오늘과의 이별을 고하리라. 억새만발한 오름을 걸으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경건해지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