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제주를 품에 안다.

일몰을 바라보며.

by 바다나무

미리 예정된 여행이었다. 남편퇴직과 함께 봄에 제주 한 달 살기를 계획했다가 바리스타 자격증시험과 일정이 겹쳐 3주 살기만 하고 돌아갔다. 그 아쉬움에 나머지 1주는 단풍 드는 가을에 다시 제주로 여행 가기로 무언의 약속을 하였다. 서유럽 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속의 약속도 중요하게 생각되어 제주로 떠나기로 했다. 어느 날부턴가 하려고 마음먹은 건 꼭 이행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다음에~"라는 말에 여지를 두고 싶지 않았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사람 삶이라 그냥 오늘에 충실하고 싶었다.


여행은 또 설렌다. 비행기도 오래 타지 않고, 말도 잘 통하는 국내여행이 벌써부터 휴식으로 다가온다. 패키지 여행과는 달리 자유롭게 쉬고, 고, 경하며 다니리라. 요즘 거리를 다닐 때마다 아름다운 단풍들이 가슴을 설레게 했는데 제주에서의 가을은 내게 어떤 설렘을 줄지 기대가 되었다. 유채꽃 피는 봄과 억새 어우러진 가을의 제주, 두계절 모두 나를 설레게 한다. 어느새 몸보다 마음이 먼저 제주에 도착해 벌써 제주의 오름을 오르고 올레길을 걷고 있다.


오전 집안일을 마치고 오후 비행기로 출발했다. 공항에는 고등학생 체험학습 일행으로 붐볐다. 수학여행을 가는 모양이다. 푸르른 청춘이 싱그럽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날아오르는가 싶더니 잠시 후 도착이란다. 한 시간도 안되는 거리다. 서울보다 가깝다. 차량 렌트를 하고 나니 배고픔이 밀려오지만 많은 식당들이 브레이크 타임에 들어간 시간이다. 그래, 어차피 비행기 타고 왔으니 동남아 여행온 기분이나 내어보자 싶어 찐맛집으로 이름난 베트남 식당으로 갔다. 쌀국수 분보와 반미로 늦은 점심을 해결했다. 고수의 향긋함이 입맛을 돋운다. 호불호가 강한 야채이지만 먹을수록 그 맛이 더해진다. 베트남인지, 제주도인지 다소 분간이 어렵지만 낯선 듯 익숙한 음식과 장소에서 여행의 발걸음을 내딛었다.


우선 닭머르 해안길을 가서 차 한잔을 마시며 여유를 즐기고 싶었다. 초당옥수수 아이스크림이 유명한 카페로 갔다. 이왕이면 지난봄에 가보지 않은 새로운 카페를 탐색할 예정이다. 초당옥수수 반토막 위에 얹어진 옥수수 아이스크림이 일품이다. 바다가 잘 보이는 카페에 앉아 커피 한잔과 아이스크림으로 쉼을 가져본다. 매일 쉬는 날임에도 제주여행은 내게 별도의 쉼을 선물한다. 볼거리, 먹거리와 함께 바다가 나를 쉬게 만든다. 그동안 세컨드하우스인 시골의 가을정리도 해야 했고, 밀린 배움들도 다시 시작하여야 해서 누가 점검하지 않아도 일상은 분주했다. 아직은 떠나고 싶을 때 훌쩍 떠고 싶었다. 가슴 떨림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직 해질 시간이 남은 듯하여 해변길을 걸었다. 제주는 지금 억새천국이다. 바닷바람에 산등성이 억새들이 춤을 춘다. 풍광 아름다운 바다와 지는 석양에 어우러진 억새가 한 폭의 그림 같다. 시원한 가을바람에 바다내음도 더해진다. 봄의 따스함과는 달리 신선하다. 오늘따라 연인들과 온 젊은 청춘남녀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인다. 돌아보니 지난 8개월 동안 난 연세 드신 어르신들과 생활했던 것 같다. 어느 모임에 가든 내가 제일 어렸다. 퇴직 후 달라진 나의 생활모습이다. 젊음이 싱그럽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어느새 난 내 생활에 안주해 있다. 평온한 노후의 일상에 젖어들고 있었다.


다시 해안도로를 달려 함덕해수욕장으로 왔다. 고운 모래에 남은 석양이 오늘과의 이별을 고한다. 바다 건너 화려한 조명이 바다를 밝혀준다. 잠시 바위에 앉아 제주에 온 신고식도 해본다. 가을 제주가 보고 싶어 달려왔노라고. 멀리 유채꽃 만발했던 서우봉이 어둠으로 다가든다. 마치 어제 왔던 것처럼 기억이 선연하다. 오늘은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에메랄드빛 바다를 보고 억새만 보아도 마음이 풍요롭다. 내가 가을을 품에 안은 듯했다. 이번 가을제주는 좀 느리게 걸으며 느껴보리라. 그동안의 삶을 반추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보서 또다시 다가올 시간들도 다독여 보리라.


*낙원식당. 닭머르해안길. 함덕해수욕장. 카페 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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