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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것 아닌 의학용어 Aug 19. 2024

동서의학의 갈림길이 된 흑사병

먼 옛날, 썩은 시체 냄새가 진동하는 전장터. 유럽 정복의 관문인 흑해 크림반도의 카파(Kaffa·현재 페오도시야)를 공격하고 있던 몽골 군대는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몽골 병사들의 시체는 적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전염병으로 인해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몽골 군대는 기발한 생각을 합니다.


"어서 투석기를 가져와라."

"대장님, 저 성벽은 투석기로 부술 수 없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 보시지 않았습니까?"

"어서 가져오라고!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돌 대신 죽은 병사들을 던져라, 성 안으로 말이다."


지휘관은 입술을 깨물며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몽골의 병사들은 죽어서도 싸운다."



그 투석기로 던져진 시체들이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을 갈림길이 될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1347년, 무시무시한 질병이 유럽을 강타했습니다. 바로 흑사병(Black Death)이라 불리는 페스트였습니다. 피부에 검은 반점이 생겨 흑사병이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불과 4년 만에 유럽 인구의 3분의 1, 약 2,500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인간이 가져온 재앙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신의 징벌’이라고 여겼습니다.



흑사병이 유행하기 약 1년 전, 1346년, 몽골 기마군단이 칭기즈칸의 손자 바투 칸이 흑해 크림반도의 카파(Kaffa·현재 페오도시야)를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포위 공격 중 몽골군 진영에서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발생해 수십 명이 일시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부득불 퇴각해야 했던 몽골군은 마지막 공격을 감행하며, 전염병으로 사망한 병사의 시체를 투석기에 장착해 성 안으로 던졌습니다. 성 안에서는 불상미명의 전염병이 빠르게 퍼지며 카파 주민들은 극도의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성 안에 있던 상인들은 급히 무역선을 타고 이탈리아로 피신했습니다. 1347년 12월 31일, 카파를 떠난 배 세 척이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의 메시나 항구에 입항하면서 원인 불명의 질병은 유럽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퍼진 전염병이 바로 흑사병, 페스트입니다.


당시 위생과 의료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는 페스트에 대한 마땅한 치료제가 없어 마을마다 봉쇄하고 상호 차단하는 방법 외에는 대처할 방안이 없었습니다. 흑사병은 빠른 전파력과 높은 치사율로 유럽 전역을 최악의 비극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던 것은 당시 대세 종교였던 기독교에 의지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교회에 모든 것을 바치거나 고행을 통해 신의 진노를 가라앉히려 했습니다. ‘채찍질 고행단’이라는 사람들이 등장하여 자기 몸을 때리며 고통을 통해 신의 노여움을 풀려했습니다. (이 당시 종교와 흑사병을 잘 묘사한 영화가 제7의 봉인입니다.) 그들의 채찍질로 사방으로 튀는 피는 흑사병의 폭탄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종교 집회는 오히려 집단 감염을 부추겼습니다. 그들의 이런 간절한 기도와 고행, 헌신에도 불구하고 흑사병은 더욱 위세를 떨치게 됩니다.


Flagellants


페스트는 사람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이슬람도 기독교인도, 종교가 없는 사람도. 왕도, 왕자도, 공주도. 귀족도, 귀족의 아들도 걸리고 신부님 아들도 페스트에 걸렸습니다. (아, 신부님은 아들이 없지. 아들 있는 신부님이 걸리면 이해가 되는데) 착한 신부님들도 걸리고, 수녀님들도 흑사병으로 죽었습니다. 종교를 이끌던 부유한 고위 성직자들은 도망가 버려 사람들을 실망시켰습니다.

흑사병은 교회의 절대적인 권위를 흔들었고, 인간은 신의 무력함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흑사병으로 인해 중세는 붕괴되었고, 중세를 지탱했던 기독교 역시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럽은 모든 것을 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던 사조(철학)에서 벗어나, 인간을 중심으로 합리적이고 실리적인 생각을 하는 인문주의적 경향을 띠게 됩니다. 이는 르네상스 운동으로 이어집니다. 개인주의가 발달하고 상업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사회와 경제의 유동성이 높아졌습니다. 이는 자본주의의 태동을 알리는 전조였습니다. 자본을 중심으로 한 상인들은 봉건제도에 대항하여 정치적인 힘을 얻게 되었고, 이는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집니다. 흑사병으로 인해 인력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중세 산업혁명이 도래했습니다. 이는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중세까지 의학은 철저히 신을 중심으로 한 의학이었습니다. 중세 동안 눈에 띄는 의학적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1300년 이후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인체 해부를 금지하여 해부학은 쇠퇴하고 맙니다. 당시 의사들은 1500년 전의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의 이론에 따라 질병이 체액의 불균형으로 생긴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갈레노스의 경전에 권위를 부여하고, 오류가 없다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중세의 기존의 의학은 사람들을 실망시켰습니다.


16세기 초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 1514년 12월 31일 ~ 1564년 10월 15일)라는 이탈리아 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과감하게 인체 해부를 하여 갈레노스와 히포크라테스의 권위에 도전하였습니다. 실제 사람을 보면서 조목조목 갈레노스의 경전(당시 이렇게 canon이라는 말로 권위를 부여하였습니다)이 틀린 것을 알렸으며, 자신이 해부한 것을 유명 화가에게 그리게 했습니다. 당시 동료 교수들은 갈레노스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학계의 보수성과 꼰대질은 시기를 가리지 않습니다. 다른 교수들은 베살리우스의 해부가 갈레노스의 책과 다른 이유는 베살리우스가 죄인들을 해부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며, 그를 쫓아냅니다. 그러나, 흑사병으로 시작된 시대적 흐름은 바꿀 수 없었습니다. 베살리우스는 대학에서 쫓겨났지만, 그의 책 '파브리카'는 전 세계적인 히트를 치며 그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옵니다. 


만약 베살리우스가 1~2백 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신성모독 혹은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했을지 모를 일입니다. 베살리우스로 인해 그 시기부터 해부학은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물리학과 수학 등 자연과학의 발전은 결국 의학 발전의 토대가 되어 현대 의학이 시작됩니다. 결론적으로, 흑사병은 유럽의 신을 중심으로 한 의학 체계를 변화시키면서 현대 의학의 초석을 닦습니다. 반면, 전염병이라는 선물을 유럽에 던진 아시아는 피해를 크게 입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럽에서 일어난 인본주의적 변화 역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시아에서는 전통의학이 유럽과 달리 근대 이후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아시아 전통의학 역시 유럽의 중세 의학처럼 해부학을 소홀히 했고, 근대적 의미의 자연과학적 의학, 실험실 연구의 의학 발전을 이루지 않았습니다. 사변적이고 관념적인 전통의학 체계로 남게 되었죠. 훗날 이 두 의학은 대항해 시대를 통하여 다시 충돌하게 됩니다.


모든 역사는 사후에 하는 해석입니다. 이러한 의학의 변화를 흑사병 하나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흑사병이 오기 전에도 유럽은 온갖 문제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중세 봉건사회 체제는 이미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고, 인구 증가와 기후 변화로 인한 대기근은 사람들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터진 흑사병의 유행은 커다란 변화의 결정타가 됩니다. 중국에서도 여러 차례 전염병이 유행했지만, 흑사병만큼은 아니었고, 의학도 변화했지만 유럽만큼 커다란 변화를 겪지는 않았습니다. 흑사병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열쇠는 아니지만, 의학의 발전에 영향을 끼친 날갯짓이었음은 명백합니다.



결론적으로, 유럽에서 흑사병은 기존의 가치체계(기독교)를 붕괴시키는 결정타가 되었으며, 이는 의학의 모습도 변화시켰습니다. 중국에서는 기존의 가치(유, 불, 선)를 붕괴시킬만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들이 전통의학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Once upon a time, in a battlefield where the stench of rotting corpses filled the air, the Mongol army faced a grave dilemma. They were besieging Kaffa (now Feodosia) on the Crimean Peninsula, the gateway to the conquest of Europe. The bodies of Mongol soldiers piled up, not because of enemy attacks, but due to a mysterious plague. Then, the Mongol army had a cunning idea.


“Bring the catapult!” the commander ordered.

“But, sir, we’ve tried using the catapult for weeks. It can’t break those walls,” replied a soldier.

“Just bring it! We’re not throwing stones. We’re throwing the bodies of our dead soldiers into the city,” the commander insisted.


Biting his lip, the commander muttered, “Mongol soldiers fight even in death.”


The bodies launched by the catapult marked a turning point between modern and traditional medicine.


In 1347, a terrifying disease struck Europe, known as the Black Death or the plague. Named for the black spots that appeared on the skin, the Black Death claimed the lives of one-third of Europe’s population, about 25 million people, in just four years. People couldn’t believe this was a man-made catastrophe and saw it as divine punishment.


A year before the plague outbreak, in 1346, Batu Khan’s Mongol cavalry, the grandson of Genghis Khan, began the siege of Kaffa. During the siege, an unknown plague broke out in the Mongol camp, killing dozens instantly. Forced to retreat, the Mongol army made one final assault, launching the plague-ridden corpses into the city using catapults. Panic ensued as the plague quickly spread within Kaffa. Merchants fled by ship to Italy, and by December 31, 1347, three ships from Kaffa docked at Messina, Sicily, spreading the unknown disease across Europe. This disease was the Black Death.


With hygiene and medical technology underdeveloped, there was no effective treatment for the plague. The Black Death, with its rapid spread and high mortality rate, plunged Europe into its darkest tragedy. The only recourse was to turn to Christianity. People sought God’s help, dedicating everything to the church or engaging in self-punishment to appease divine wrath. Flagellants emerged, whipping themselves to atone for humanity’s sins. However, their blood-splattered gatherings only fueled the plague’s spread.


The plague spared no one: Muslims, Christians, non-believers, kings, princes, princesses, nobles, even priests and nuns, and their kids  succumbed too. Oopsie, they don't have kids certainly, my mistake.  Even wealthy clergy fleeing for safety further disillusioned the people.


The Black Death shook the absolute authority of the church, and humanity experienced the powerlessness of God. The plague led to the collapse of the Middle Ages and the decline of Christianity. Europe shifted from a God-centered philosophy to humanism, sparking the Renaissance. Individualism flourished, commerce thrived, and social and economic mobility increased, heralding the dawn of capitalism. Merchants gained political power, leading to the French Revolution. The significant reduction in the workforce due to the plague led to the Industrial Revolution, eventually resulting in the discovery of the Americas.


Medieval medicine was deeply rooted in theology, with little progress during the Middle Ages. In 1300, Pope Boniface VIII banned human dissection, stifling anatomical studies. Doctors adhered to the theories of Hippocrates and Galen, believing diseases stemmed from imbalances in bodily fluids. This rigid adherence to ancient texts disappointed people.


In the early 16th century, Andreas Vesalius (1514-1564) emerged as a pioneering Italian scholar. He boldly performed human dissections, challenging the authority of Galen and Hippocrates. He meticulously documented discrepancies between Galen’s texts and actual human anatomy, commissioning artists to illustrate his findings. His colleagues, resistant to change, rejected Vesalius’ discoveries, claiming the differences were because Vesalius dissected criminals. Despite being ostracized, Vesalius’ book “De Humani Corporis Fabrica” became a worldwide success, bringing him wealth and fame. Had he been born a few centuries earlier, he might have been executed for heresy. Vesalius’ work significantly advanced anatomy, and the development of physics and mathematics laid the foundation for modern medicine.


The Black Death thus reshaped Europe’s medical landscape, paving the way for modern medicine. In contrast, Asia, less affected by the plague and lacking similar humanistic shifts, maintained traditional medicine. Like medieval European medicine, Asian traditional medicine neglected anatomy and did not develop a modern, scientific approach. These divergent paths in medicine eventually clashed during the Age of Exploration.


All history is interpreted in hindsight. While the Black Death wasn’t the sole catalyst for medical transformation, it significantly influenced the course of medical history. Europe was already struggling with numerous issues before the plague, and the outbreak was a decisive blow. In China, various epidemics occurred, but none as transformative as the Black Death in Europe. While not the sole key to understanding medical advancements, the Black Death undeniably played a crucial r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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