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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름 Apr 11. 2022

"왜?"

-그럴싸해 보이는 이유를 찾는 누군가에게

[왜 그렇게 생각했나요?]

 "지구촌에 사는 아이들은 모두 친구가 될 수 있어요. 우리는 한 행성의 사람들이기 때문이에요."

 초등학교 6학년 무렵, 나는 저런 원대한 주장을 펼친 적이 있다. 그 왜, 학교에 가면 우리는 뭐든 연필을 잡고 그리거나 써야 하잖는가? 아무것도 안 하는 걸 교육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니까.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어떻게든 아이들을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다. 의무. 어쩌면 그것이 그때 육 학년 삼 반 담임을 맡고 있던 '그'의 아이덴티티, 다시 말하면 교감이나, 선배 선생님에게 치이면서도 삶을 살아가게 하는 보람의 원천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 아이들의 책상 위에는 한 장씩 a4용지가 놓였고, 우리에게는 그 위에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을 써서 발표까지 완료해야 하는 미션이 주어졌다. 나는 아무것도 주장하고 싶지도, 싸우고 싶지도, 내 주장이 트로피 비슷한 게 되어서, 남들이 하는 반박이 빛나 보이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쓰지 않으면, 주장하지 않으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없었다. 즉, 어떻게든 '주장하고 싶은 말'을 쥐어짠 결과가 "지구촌 친구들은 모두 친구다"라는 거다.

  "선생님. 근데 저건 아니지 않나요? 그렇죠 선생님."

 사실 저 말에 반박하라면 셀 수 없이 많은 반박이 가능하다. '한 행성의 사람들'이 아니면 친하게 지낼 필요가 없냐는 둥, '백터맨-그때 당시에는 남학생이 백터맨을 모르면 이상하게 봤다-'도 안 봤냐는 둥, 상대방이 먼저 공격하면 바보 같이 손만 내밀 거냐는 등의 공격 섞인 반박 말이다. 우리 반의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칭찬받기 위해, 어쩌면 자신의 달변을 자랑하기 위해, 내 주장에 많은 이의를 제기했다. 주장, 그리고 공격. 나는 어느 정도 예상했었지만, 공격을 받는 것과 공격을 하는 것이 너무도 뚜렷한 이 순간이 상당히 폭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이해해주면 안 되나? 아무리 내가 쥐어짜듯 쓴 주장이라고 해도, 손을 번쩍 들어 "선생님! 저건 잘못된 거 같아요. 그렇죠 선생님." 하며 확인 사살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왜 그렇게 생각했나요?"

  그의 대답에 나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이유 따위는 없었다. 나조차, 지구촌에 살든, 화성에 살든 아무와 친구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단지, '써도 지랄, 안 써도 지랄하는 저 아이들의 덫에서 어떻게든 발버둥 쳤을 뿐이라는 것을, 저 어처구니없는 경쟁구도에서 나 좀 빼줬음 한다는 걸 그도 알았으면 좋겠다'라고 속으로 생각할 뿐이었다. 유난히 시끄럽게 우는 매미, 발언권을 모두 써 버린 아이들의 일순간 정적, 쨍한 점심께 햇살,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리는 그 무렵, 나는 3년째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


  [왜가 없으면 안 되나? 왜?]

   "다른 대학교도 많은데 왜 이 학교에 지원하셨죠?"

   고등학교 3학년 되자, 나는 사활을 건 문제에 당면해 있었다. 왜 지원했냐고? 여기가 제일 좋다기에 지원했어요. 고등학교 3학년이 할 수 있는 모든 서치 방법을 총동원해서 내린 결론이에요. 남들도 여기 가면 좋댔어요. 진학사 어플라이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라고는 당연히 말할 수 없었다.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고귀한 이유. 나는 그 몇 초 동안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땀이 눈에 들어가 따끔거렸고, 온몸이 원치 않는 사건을 본 목격자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그럼에도 붙기 위해, 고졸이라는 딱지를 벗어나기 위해 난 무언가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윽고, 면접이 끝나 학교를 나올 땐, 내가 무슨 질문을 받았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 학교는 떨어졌다. '불합격입니다'라는 결과를 보고, 나는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마지막 면접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으니 떨어진 것이리라. 면접관이 했던 마지막 질문을 곱씹자, 짜증이 치밀었다.

  "아니, 왜라는 게 왜 필요해? 왜가 없으면 안 되나? 왜?"

  나는 주먹으로 책상을 쾅, 하고 쳤다. 이윽고 부모님의 욕 한 바가지와 얼얼한 주먹을 얻었다. '왜'인지 '왜'에 올가미에 빠진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게 좋으니까]

  누군가에게'왜'에 대한 대답을 할 때, 나는 '그럴싸해 보이고 자신을 적절히 잘 포장하면서, 자신의 약점에 대해서는 감출 수 있는 프레시한 대답'을 찾아야 하는 부담감에 휩싸였다. 상대방을 납득시키지 못하면 그대로 '그게 왜?'라는 공격을 받기 쉬워지기 때문이었다. 결국 대답이 애매모호해지면 이슈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상대방이 나를 오해하거나, 이상한 사람으로 쳐다보는 등 예상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나는 그게 항상 두려웠다. 그래서 내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이유를 계속해서 만들어내곤 했다. 그래야 남들이 이해해주니까. 그래야 이 각박한 현실에 대항한 내 '결계'를 만들 수 있었으니까.

 "이게 좋아서 그래. 뭔 이유가 뭐 있겠어."

  근데,  '만들어낸 수많은 이유'가 남긴 건 우울증과 불안장애였다. 나는 내가 더 잘 안다. 이유가 없어도 이게 좋으니까 하는 거다. 이래서 좋다, 저래서 싫다, 이유 붙이기가 짜증 나서, 결국 난 내 '쪼'대로 굴기 시작했다. 왜라는 이유에 거짓말을 달지 않기로 했다. 가타부타를 지우니 조금은 못생긴 내가 보였지만 아무렴. 그게 나인 걸. 어쩌라고.

 지금은 조금 숨 쉴만한 거 같다. 답답했던 것들이 조금씩 사라지자 '그럴듯한 이유'가 사실 뭐가 중요한가 싶다. 남들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걸, 내 거에 붙여준다고 내가 예뻐지진 않는 것이다. 내가 내 스스로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선인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내일도, 내일모레도, 한참을 함께 할 나이기에 오늘은 내 멘탈에 합격통지서 하나 붙여주고 싶다. "이유 따윈 필요하지 않아. 그냥 너 좋아 합격"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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