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이디 Mar 14. 2024

시댁으로 귀국했다. 4

영원한 건 없다.


맑은 하늘과 뭉개 구름이 참 좋다.

철길 옆 좁은 길을 따라, 유치원까지 이젠 더 이상

헐떡이며 뛰지 않고, 천천히 여유롭게 마중가는 이 시간이 너무 감사하다.

소소한 일상이 행복이란 걸  깨달았고, 사람을 미워하는 것에 내 삶을 허비하지 않고 살 수 있어서 다행이다.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했던 사람도, 친구도, 나도,  30년, 40년 후에는  지구상에 없을 가능성은 아주 많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 영원한 건 없다는 걸  입으로는 말하지만, 영원히 살 것 같은 착각으로 산다.



장모와 살면서, 근면성실하게 다람쥐처럼 열심히 산 시아버님의 최후는 암이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뼈로 암이 전이가 되었고, 가족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베베’ 꼬인 큰아들은 병상에 계신, 1년 반을 단 한 번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고, 당연히 큰 며느리도 나타나지 않았다.  

출세하도록 교육을 시키고, 지극정성으로   자식을 키워주면, ‘장남’들은 보통 저렇게 된다.

이 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체로 잘난 자식은 죽여주는 ‘자가용’을 타지만,

바빠서 만나기도 힘들고, 아는 것도 너무 많아 ,

그와는 대화도 잘 안 통하고 어렵다.


남편이 시어머니께 혹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몇 번을 물어보았지만, ‘자신은 모른다며 ‘ 큰며느리 탓을 했다.

큰며느리는  게으르고, 눈치도 없고, 연락도 잘 안 하고, 밥 한 끼를 같이 먹어도 ‘ 나눠내기‘ (더치 페이)을 하자고 하고, 아들보다 5살씩이나 나이 많은 것도 불만이셨다.  자신의 아들을 “꼬시려고” 결혼 전에 짐 싸들고 아들 자취방에 들어온 염치없는 늙은 며느리 …..


자신의 저런 기분이 장남 가족에게 분명 전달 됐을 것 같다.  인간은 나쁘고, 싫은 것은 잘 감지하는

 ‘더듬이’가 있다,




시어머니와 병문안을 함께  가곤 했을 때, 시어머니의  ‘병문안 의상이’ 참 신경 쓰였다. 빨간색 바지와 빨간 립스틱을  자주 발랐고, 병원 갈 때마다 향수냄새도 독했다.


 너무 이상해서 남편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어머님의 빨간 바지와 립스틱 어떻게 생각해”

“ 그게 뭐 어때서?”

“사람이 아픈데 말이야! “시뻘건 바지를  입는 것도, 향수를 뿌리는 것도 좀 경우가 아니지 않아”?

“엄마가 아픈 것도 아닌데, 무슨 옷을 입건 본인 마음이지.”

“그렇게 생각해? 진심이야?”

“응, 진심이야”.

“그렇구나!  그럼 자기가 암 걸려서 죽으려고 그럴 때, 나도 빨간 바지 입고, 붉은 립스틱 짙게 바르고, 병문안 갈께!”

…“그래”….

우린 틀린 사고를 갖고 있구나!




결국 마지막 임종날이 다가왔고, ‘ 오늘을 넘기시기 어렵다 ‘고 병원으로부터 통보 전화가 왔다.

병원으로 아침 10시에 모든 가족이 모였다.

심각한 상태셨고, 나는 마음이 아팠다.

사람은 죽으면 다시는 못 만난다. 그게 너무 슬프다.


가족은 그의 죽음을 기다렸다. 마지막이 안타까워 함께 있어 주는 것이 아닌, 그냥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오후가 되도 아버님은 돌아 가시진 않았다.

출세하신 장남이 말했다.

“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데, 이렇게 마냥 기다릴 수 없으니까, PC방 갔다 올께!“

……………

그의 ‘고삐리’ (고등부) 아들도 한술 떴다.  “나도 일단 집으로 돌아갈래요. 더는 못 기다리겠어요. “


 막장도 이런 막장이 있나…,


‘ 두  ‘싸가지’들은 사이좋게 병원을 나갔다.’


몇 시간 지난 후 돌아와서 아들들과 시어머니는 대기실에서 할 이야기가 있다며 가고

형님과 나만 병실에  남았다.


형님이 갑자기 남편과의 불화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불만을 털어 놓터니, 자신은 죽으면 시댁 ‘묘’에는 절대 안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선조의 ‘묘’ 속에 함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일본식으로 ‘장남 부부’만의 ‘특권’이기도 하다.

선조들의 뼈가 들어있는 묘에(죽으면 그곳에 함께 묻히는 문화가 있다.  

시어머니는   ‘산소’에  갈 때마다 우리에게, ”너희들은 둘째니까 이 ’ 묘소에 합장‘ 합장할 수 없다고 못을 ’몇 번이나‘박으셨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 일본 선조  묘소에‘ 내 뼈를?


오우~~ 감사해요 어머니!  저속에 안 들어갈 특권 주셔서..


나는 같은 묘에 들어간다는 의미가, 뼈 가루를 다 섞어 ‘휘’휘‘ 젓어 버리는 줄 알았다. 그건 아니지만 자신의 뼈가 들어간 항아리를 같은 묘에 넣어 두는 것이다.

나는 몸서리치게  싫다.



큰며느리는 여러 가지 불만을, 친하지 않은 동서인 내게 자세하게 말해 주었다.

남편과는 아주 많이 ‘소원’한 관계 이므로, 이 집 안의 일에는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아~~ 소우데스까.., 그러시군요. 밖에 할 말 없었다.

친하지 않아서 말하기 쉬웠나 보다.


기다리던 큰 며느리도 어디론가 가버렸다.

나도 화장실을 갔다.

물 내리는 ‘버튼이‘ 안보였다. 여기저기 한참을 찾다가 어떤 버튼을 눌렀다.

갑자기 버튼에 빨간 불이 켜 지면서  ’ 소리가‘나기 시작했다. 간호사 몇 명이 전 속력으로 내가 있는 ‘ 화장실’ 쪽으로 “고꼬?(여기?) 아소꼬?(저쪽?)하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오! 마이 갓!!

‘우왕’ 어쩌지?   내가 무신짓을 했나?  에라 ~ 모르겠다. 일단  황급히 도망쳤다!

간호사들이 화장실로 급히 들어가는 것을 보고 모른척하고 얼른 병실로 돌아왔다.


한문을 잘 몰라 물 내림이 아닌, 응급버튼을  눌렸나 보다.   

일본에 살려면 한문 공부를 빨리 해야 한다.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도 대기실에서 시어머니와 큰아들, 남편이 대화하는 중이었고,


나는 시아버지 병상 옆 의자에서,  의식 없이, 숨이 가빠하시는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갑자기 호흡곤란을 일으키시는 게 아닌가!..

대기실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큰 유리문 안에서는 형제의 ’ 난‘이 일어난 것 같았다.  ‘ 삿대질을’ 해대며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 서로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가관도 아니었다.

부모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싸움질이라니!

하긴 우리 집도 개판이긴 하지만, 누가 아플 때는

안 싸웠다. 우리 집이 좀 났다,


“여보 빨리 와! 큰일 났어!


세명은 싸움을 멈추고 나를 앞질러 병실로 달려갔다.



 




작가의 이전글 시댁으로 귀국했다. 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