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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 Mar 18. 2024

시댁으로 귀국했다 5

울지 않는 슬픔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얼마 전 꽤 유명한 일본 배우의 자녀가 자살을 한 사건이 있었다. 그녀 또한 유명한 가수였기에, 대단한 뉴스로, 모든 채널이 그녀의 이야기로 도배가 되었었다.

딸의 죽음이 있고, 그는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아버지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방송에 임하는 모습이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방송을 취소할 수도 없고,

실컷 ‘울’ 자유도 없는 사람 같았다.

까칠한 얼굴을 한 그의 방송을 보면서,  ’ 하루 방송 취소하고, 온전히 딸의 죽음을 ‘애도’ 해도 아무도 욕 하지 않을 텐데…

그는 그 이후로도 한 번도 쉬지 않았다.

냉정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슬펐겠나..

게다가 엄청난 비난까지 받고. 나도 조금 거들긴 했다. 독한 사람이라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목놓아 울었을 것 같다.




‘통곡‘하고 울어야만 슬픔의 표현이 올바르다고 할 순 없지만,  ’ 눈물‘ 은 가장 적당한 슬픔의 표현이 아닐까 싶다.



“몇 시 몇 분에 사망하셨습니다. “라고 의사가

사망선고를 내렸다.

나는 ‘왈칵’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버님을 너무 사랑해서도 아니고, 뭔지 모르지만 이젠 이분을 내가 죽을 때까지 불 수 없는 게 슬펐다.

 ‘엉~엉~‘꺼이꺼이‘ 시아버님 손을 잡고 울었다.


갑자기 옆에서 “ 모시 모시” 고찌라 00 데스... 고노 아또노 나가레 데수가 ~~ 랑랑 한 아가씨 같은 목소리가 들려 , 나는 벌게진 얼굴을 하고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시어머니가  ‘단정한 ‘ 얼굴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순간, ‘뭐야’! 둘러보니 ‘아무도’ 울지 않고 있었고,

장남이 내 쪽을 큰 눈으로 ‘쏘아’ 보는 것 같았다.   

갑자기 울고 있던 나는 쑥스러웠다.

진짜 가족은 멀쩡히 서있는데,

나 혼자 서럽게  울고 있었던 것이었다…

장남 눈에 내가 가증스럽게 보였를 것  같았다.

 “ 네까짓 게 뭐라고 우리 집 초상에 울어?  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난 눈물이 멈추질 않았고, 죽은 ’ 내 엄마‘ 의  마지막 모습이  함께 떠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

하긴 나도 엄마가 죽고 울지 않았다. 그리고 성인이 될 때까지 ‘엄마’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는 방법으로  슬픔을 참아냈다.



시어머니는 장례 회사에 전화를 한 것이었다.

가족장례로 할 건지, 어디서 할 건지, 얼마짜리 식으로 할 건지, 결정할 것투성이고, 뭘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을 것이다.

일 평생 남편이 시키는 데로만  하고 살던 시어머니는 이제부터 모든 것을 혼자서 결정해야 하는, 늙은 미망인이 되었다.




얼마나 두려웠겠나… 게다가 자식들은 싸움질하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 남편이 죽자마자 ‘애도의 시간도 없이, 저리도 급할까!  혼자 남겨진  ‘미망인’ 시어머니의  심정은 전혀 헤아려지지  않았고, 내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다.

추 성훈 씨 아내 ‘ 야노시호’ 같은 고음으로  

장례회사와 앞으로의 의식 진행에 대해 연락을 몇 번이고 주고받는 동안 형제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차가워진  시아버님을 모시고 저녁 늦게 시댁으로 돌아왔다.



1층 불당 앞에 모신 후,  아들들이  아무 말 없이 약속한듯 이층으로 올라갔다.

2차전이었다.

외부로 소리가 새지 않도록, 쥐 죽은 듯이 아주아주 오랜 시간 싸워댔다!

나란 인간은, 이 와중에도 배가  무척 고팠다…..

혹시라도 칼부림 날까 봐, 나는 부엌에서 칼을 지키면서 컵 라면을 ‘홀짝’이며 먹었다. 시댁만 오면 배가 고픈지..

두 형제는, 서너 시간은 족히 조용한 싸움질을 한 후 내려왔고,  결판을 못 낸 것 같았다.  

화가 많이 난 ‘남편’은 눈썹이 위쪽으로 치켜 올라간 채로 ‘분’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피곤에 쩔은 우리들은 거실 의자에  힘없이 걸터앉았다.


장남이  자기 부인에게

“이제부터 내가 말하는걸 좀 받아 적어. “라고 하니

“ 하이”はい! 짧게 대답하고,

그녀는 빠른 손놀림으로 가방에서 볼펜과 노트를 테이블에 올리더니 그가 하는 말을 적기 시작했다.

그녀는 ‘비서’ 같았고

그는 ‘회사 상사’ 같았다.

부부라고 하기엔 특이했다.



초상이 나면 ‘ 통곡’은 기본이고, 한 맺힌 듯 슬픔을 표현하는 한국인으로서 이상했고, 형제가 죽일 듯 싸우는 꼴 보고 피곤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가족이 모이면 싸움질이나 해대고,,, 돌아가신

시아버님이 어떤 기분이었을까… 돌아가시기 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내가 큰아들이라고, 너무 엄하게 키워서 서운했나 보다.라고..

(큰 아들들은 빨리 태어난 ‘죄로 엄하게 키워지고, 부모의 기대에 부합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냉철인간이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장남, 장녀들도 불쌍하다. )


싸움도 지쳐서 중단하고, 큰아들네는 자신의 집으로 멋진 포르셰를 타고 갔다.

남은 우리는 전철도 끓어졌고, 시아버님이 누워계신 방으로 갔다.


남편이  ‘ 아버지의 차가운 얼굴을  천천히 어루만지더니, 자신의 얼굴을 볼에 갔다 댔다…. 내 앞에서 눈물은 보이진 않았지만, 그 행동으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편은 장남이 아닌, 둘째로 태어나, 자유로웠고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다….




형은, 차남인 남편의 자유로운 인생을 부러워하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 이층에서 자고 가거라! 전철도 끓기고 없잖니! “

“네” 어머님.

오래되어, 쇠덩이 같은 목화솜이불을 덮고 누웠다.

“ 여보, 왜 싸웠어? “

낮은 목소리로 남편이 말하기 시작했다.

“ 아버지가 아픈지 꽤 됐는데, 병문안 한번 안온 ‘형‘이 장례를 자기가 주관하겠다고 하잖아.

“ 그래? 자기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 그게 ‘ 장남의 특권’이라고 하더라. “

“장남이 그런 거 구나…

“ 살았을 때는 보기 싫은 부모인데, 죽고 나니 책임을 지고 싶은 건 왜일까,? 죄책감 때문에 그러나? 아무튼 대화가 너무 안 통했어.

그리고 물어봤지,

“ 어머니, 아버지랑 무슨 일 있었냐고 몇 번을 물었는데

‘형이, 진짜 아무 일도 없었데!’

“ 근데 왜 저래? 너무 이상한데?

그렇게 정답은 모른 채 싸움은 ‘종료’ 했다고 한다.

서로 아무리 말을 해도 ‘평행선’을 달렸고, 서로의 의견은 절데 좁혀질 수 없었다고 한다.


“ 형은 내가 대학생일 때까지 기억으로는  나를 무척 아꼈은데, 많이 변했어….  우리가 너무 안 만나서 그런가? 말이 안 통해…



장례식 날이 오고 시어머니가 ’아주아주‘검은색

‘기모노를‘ 나프탈렌‘ 냄새나는 긴~상자에서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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