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님한테는 붕어빵 드린 거 비밀로 하셔야 돼요!”
무더위가 심했던 어느 여름날, 백발의 노인이 병동 문을 열고 들어왔다.
180cm는 훌쩍 넘어 보이는 건장한 체구에 그을린 피부를 가진 노인이었다.
그 옆에는 노인과 비슷한 존재감에 매서운 눈빛까지 더해진, 아들임이 분명한 보호자가 서 있었다. 에어컨 밑에 있는 나조차도 땀이 삐질삐질 나는 날씨인데도 정장을 입고서 이마에 땀 한 방울 맺히지 않은 보호자의 모습은 설명할 수 없는 위압감을 주었다.
아들은 병동을 한 바퀴 쭉 훑어본 뒤 나와 눈을 마주한 채 다가와서
“선생님이 저희 아버지 담당이신가요?”
라고 말하며 명함을 하나 내밀었다.
‘OO법률사무소, 검사 출신 변호사 XXX.’
명함을 읽음과 동시에 보호자의 가방 속에서 각종 서류가 줄줄이 나왔다.
“이건 의무기록지이고, 이건 제가 지난 기간 아버지가 받으신 치료, 혈액검사 결과, 암 수치 결과, 영상 검사 결과를 종류별로 따로 정리해놓은 노트입니다. 이건 이때까지 다니셨던 병원에서 써준 의사 소견서를 날짜별로 정리해 놓은 겁니다. 영상 CD는 제일 최근 것만 보겠다 하시면 이걸 드릴 거고 지금까지 한 모든 영상을 보시려면 다른 곳에……(중략)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저희 아버지는 마지막 선택지로 면역항암제를 쓰고 계시기 때문에 감염, 특히 폐렴에 노출되기가 쉽고 이전에도 염증이 반복되어서 항생제는 이런 종류들로 써왔고……”
의료진 입장에서 이렇게 정리해서 알려주는 보호자는 감사한 분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명함을 건네받을 때 마주한 매서운 눈빛을 떠올리며 계속 이어지는 말들을 듣고 있으면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한방병원이라서 선뜻 모시고 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집으로 모시기도 힘들고 병원에서 하신 연구들, 실적들을 찾아보고 나름대로는 지인들한테까지 물어보면서 신중하게 판단해서 온 겁니다. 보통 병원에서는 전화로 상태 설명을 해 주시던데 제가 근무 중에는 전화를 받을 수가 없어서 오전 9시 이전이나 오후 7시 이후에 연락 주시면 바로 받겠습니다. 오늘은 자료들 다 보시느라 정신 없으실 테니 내일 저녁에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보호자는 뭐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돌아섰다.
당시에는 쏟아지는 정보와 말을 주워 담기에도 급급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짧은 시간 만에, 한방병원에 암 환자를 입원시키는 보호자로서 가질 수 있는 모든 우려를 솔직하게 다 표현해준 덕에 주치의로서 책임감이 더 생겼던 순간이기도 했다.
내일을 기약하며 병동을 홀연히 떠난 아들이 익숙한 듯, 환자는 혼자서 병실을 찾아 들어가 스스로 짐 정리를 마치고 눈을 감은 채 쉬고 있었다. 건장해 보였던 체격은 막상 가까이서 보니 확연히 도드라지는 파리한 안색에 묻혀버렸다.
금방까지 듣고 온 보호자의 설명에 따르면 4년 전 폐암을 진단받자마자 수술을 했지만 재발되었고, 방사선치료를 했지만 전이되었고, 2년 가까이 종류만 바꿔가며 끊임없이 항암 치료를 받아오다가 결국 마지막 선택지로 보험도 되지 않는 면역항암제를 사용하는 상황이었다.
70대 폐암 환자의 파리한 안색이 그동안의 지친 심신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환자에게 몇 가지 간단한 질문을 하는 동안에도 계속 눈을 감고 있기에 일단 푹 쉬시라며 대화를 일찍 마무리 짓고 병실을 나오려 했다.
그러자 그제야 눈을 뜬 노인은 지그시 나를 쳐다보면서 말을 덧붙였다.
“김 박사, 나는 먹는 거 포기 못해.”
지난 4년간 누적되어 온 피로가 만든 의지였을 것이다.
물론 ‘잘 먹어야 견딘다’는 어르신들 간의 신념이 일상 대부분에서는 맞다. 하지만 암 치료를 받다 보면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이 치료 방법’인 상황이 생긴다. 말은 쉬울지 몰라도 몇 날 며칠을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못하고 기약 없이 쫄쫄 굶어야 되는 것이다. 반복되는 검사로 금식에는 이골이 난 암 환자들이기에 ‘살기 위해 강요되는 금식’을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아마도 노인의 한 마디 또한 지나온 경험들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그다음 날 저녁에 보호자와 연락을 하며 물었더니 ‘아버지가 인생에서 먹는 낙이 매우 큰 분이시다’라고 말해주었다.
***
‘살기 위해 먹으려는 자’와 ‘살리기 위해 안 먹이려는 자’의 갈등은 입원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바로 시작되었다.
항암 치료 부작용으로 인해 발생한 폐렴에 더해서, 음식물들이 공기가 드나드는 길로 잘못 넘어가면서 생기는 염증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밥을 먹을 때마다 폐렴이 심해지고 있었다. 이런 때가 바로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이 치료법인 상황’이었다. 목 삼킴 검사를 통해 반드시 금식하라는 의과 기록도 받았고 병원에서 환자에게 제공되는 식사도 끊어 버렸다.
하지만 환자 옆의 쓰레기통에는 다 먹은 빵 봉지가 매일 새롭게 버려져 있었다.
“이렇게 먹다가는 항암 치료고 뭐고 염증 때문에 돌아가실 수도 있다”
는 내 말에도
“먹어서 면역력을 높이면 어떤 병사든 못 이길 게 없다”
고 대답하는 환자였다.
그 아집을 보고 있으면 지금까지 아버지가 무사히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끌고 온 아들이 대단하게 생각되곤 했다.
모든 치료 과정을 의료진만큼 잘 알아야만 순간순간 부딪치는 아버지를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앞에서는 환자에게 쓴소리를 하고 뒤에서는 나빠진 상태를 수습하는 걸 반복했다.
이런 날이 많아질수록 명함을 건네며 매섭게 말하던 아들 또한 그저 아버지가 너무 걱정스러웠던 한 명의 보호자일 뿐이라는 생각이 커져 갔다. 나중에 보호자가 해준 말이지만, 첫 만남 때는 일하다가 급히 나온 거라 무엇보다도 시간이 너무 촉박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물론 변호사 명함부터 건넨 건 무언의 압박으로 조금은 의도한 측면도 있었다고 말했다.
***
환자가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는 날은 점점 길어졌지만, 오히려 보호자와 나 사이에 있던 처음의 긴장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아들의 말조차 듣지 않으려는 아버지가 우려되는 중에 매일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서 같이 걱정하고 방법을 찾아 나가자는 나의 말이 아들의 마음을 움직인 건지, 생각보다 더 정성으로 그리고 정확하게 아버지를 챙기는 의사의 모습에 신뢰가 쌓여온 건지, 아니면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경계가 허물어진 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같은 편에 서서 아버지를 말리고 있었다.
하지만 둘이 힘을 합쳤음에도 불구하고 노인의 신념을 꺾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자유를 만끽하던 환자는 어느 날 새벽, 의식을 잃고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폐렴의 악화로 생긴 패혈증 때문이었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첫날에는 연명치료중단동의서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2주간의 집중 치료 끝에 환자는 중환자실에서 벗어나 우리 병동으로 다시 옮겨졌다.
다시 찾아온 자유에 쓰레기통을 또 한 번 수많은 빈 봉지로 채울까 했던 걱정은 기우였다.
70년 동안 쌓여온 노인의 고집은 2주 만에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아무것도 먹으면 안 된다 할 때는 그렇게 몰래 빵을 먹던 사람이, “이제 물 한 모금 정도는 드셔도 돼요”라는 말에도 입을 꾹 닫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으로 바뀌어 온 것이다. 보호자와 나의 지난 노력들을 생각하면 다행이고 고마운 변화였지만 한편으로는 당신에게 2주간의 기억이 70년의 세월을 이기는 또 다른 두려움으로 남아버린 것 같아 마냥 기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
한 달 만에 다시 한 목삼킴 검사에서 ‘경화제(경도를 높이기 위하여 첨가하는 물질)를 사용해 요거트와 비슷한 점도로 맞춘 음식은 먹어도 된다’는 소견이 나왔다. 반가운 소식을 곧바로 전하자 환자는 행복한 내색을 비치며 말했다.
“그럼 우유에 경화제 얼마나 타야 되는지, 김 박사가 나 좀 봐줄 수 있어?”
빵을 좋아하는 분답게 처음으로 선택된 음료는 우유였다. 요거트 점도에 맞추기 위해 우유에 타야 하는 경화제의 양을 묻는 노인의 모습은 여전히 참 적응이 되지 않았고 이제는 오히려 짠해 보이기까지 했다.
같이 경화제를 조금씩 우유에 타보면서 젓가락으로 저으며 점도를 확인하며 말했다.
“이제 식사하실 수 있는 거예요. 그간 드시고 싶으셨던 거 없으세요?”
“……없어. 먹다가 또 3층 내려가면 어떡해.”
3층은 중환자실이 있는 층이었다.
“아휴…… 말씀해 보세요. 이제 어르신이 알아서 잘 조심하시잖아요. 먹는 게 낙이셨다면서요.”
“……붕어빵.”
“경화제는 종이컵 반 정도 담아서 같이 타 드시면 될 것 같아요”라고 말하고 병실에서 나와 가운을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붕어빵을 파는 곳을 찾기 위해 병원 근처를 분주히 돌아다녔지만 요새는 겨울철에도 잘 안 보이는 붕어빵 노점상이 푹푹 찌는 한여름에 있을 리 만무했다. 아쉬운 마음에 대형 마트에서 파는 냉동 붕어빵을 사서 가져다주었다.
“딱 1개만 드셔야 해요!”
붕어빵이 요거트 제형은 아니니 사실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이었다.
아무리 어느 정도 같은 편이 되었다지만 아들 귀에 들어가면 한 소리 들을 게 분명해
“아드님한테는 붕어빵 드린 거 비밀로 하셔야 돼요!”
라고 말하고 뒷말도 듣지 않은 채 얼른 자리에서 떠났다.
하지만 며칠 뒤 아들은 그 날씨에 어디서 구해 왔는지 따끈따끈한 노점 붕어빵을 스테이션의 모든 사람에게 돌렸다.
괜한 우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르신은 댁으로 퇴원하셨고 이후에도 항암치료를 계속 잘 받으시다가 주무시는 중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연세를 고려하면 암 때문일지 노환 때문일지 구분이 되지 않기도 하다. 무엇보다 아들이 아버지를 고통 없이 보내드릴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이, 그가 아버지 옆자리를 지키며 겪어 온 심신의 노고를 아는 사람으로서 가장 감사한 일이었다. 늦게라도 병원에 재차 찾아와 아버지의 마지막은 편안했음을 나에게 말해준 것도 고마웠다.
당시에는 표현하지 못한 감사함을 이 글을 통해서라도 남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