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좋다고 그저 넘길 수는 없게 되었다.
이렇게 글을 작성하고 있는 본인도, 이런 글을 읽고자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당신들도 옷, 패션, 쇼핑 등등을 (어쩌면 과하게)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다만 스스로가 옷과 패션 둘 중 무엇을 더 좋아하는지는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둘을 구분 지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면, 그리고 이 업계를 자신의 업으로 삼고 있거나 그러고자 한다면 두 번, 세 번 생각해 볼 일이다. 덧붙여 이 업계의 향방은 과연 둘 중 어느 쪽으로 결정될 지도 함께 짚어볼 필요가 있다.
옷은 우리가 만질 수 있고 매일 두르고 있는 실물이지만, 패션은 화면으로 바라볼 수만 있다. 스크린 너머의 세계라고 한들 그곳을 우리가 생각하는 패션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패션은 단지 우리들의 상상 속에 부유하는 어떤 개념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허상으로 치부하기에는 이 ‘유행’은 이미 자신의 본질인 옷을 뛰어넘었다. 심지어 옷 자체에만 영향을 주지 않고 옷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조차 바꾸고 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이미지만으로 소통한다. 순수한 시각적 표현을 제외하고 글, 대화와 같은 다른 언어가 개입하려면 15초, 140자 같은 온갖 제약이 추가된다. 아무리 인간은 더 게을러지기 위해 진보해왔다지만, 이쯤 하면 충분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지나치게 직관적이고, 지나치게 이해하기 쉬운 방식만 성행하는 상황을 낙관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 이 양상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에게 수용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자 필요로 하는 시간이 다른 법인 감상을 허락하지 않고 휙 사라져 버리는 몰입형 전시처럼 내가 받아들인 정보에 대해 충분히 받아들일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조지 오웰이 1949년에 상상하던 미래 모습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이미 다른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시, 공간을 통제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덕분에 이 글의 제목 같은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전통적인 패션 디자인 과정만으로는 옷을 디자인할 수 있을 뿐, 패션까지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패션 디자인 산업 속 옷은 패션 디자이너의 매체로,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기호, 배경, 정치적 의견, 사회적 사건 등 자신이 피력하고 싶은 내용을 옷에 담아내었다. 과거에는 방식에 관계없이 프레젠테이션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그러니까 디자이너의 손을 떠나면 그 이후로는 매출, 재고 관리 같은 일들이나 신경 쓰면 되었지만 더 이상은 그렇게 좌시하고 있을 수 없다. 이 디자이너들의 컬렉션, 디자이너들이 생산해낸 이미지들이 이미지로 소통하는 공간 속에서 끊임없는 재생산과 재소비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디자이너들은 무엇을 보여줄지만큼이나 자신의 옷이 어떻게 보일 까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자신들의 옷이 2차, 3차적으로 어떻게 소비되고 재창작될 수 있는가(혹은 자신의 창작물은 이러한 재생산에 참여 가능한가)에 대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TikTok Couture’, 하단에 첨부한 기사에 등장하는 이 단어야말로 옷과 패션의 관계 역전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가 아닐까. 이 단어는 단순히 ‘틱톡이라는 플랫폼이 트렌드를 결정한다’를 뜻하지는 않는다. 틱톡에서 소비되는 옷의 이미지(패션)들은 복식사의 해체와 다른 의미로 옷을 해체한다. 그리고 이미 지나치게 빠르지 않은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들던 유행의 수명을 더욱 단축시킨다.
The pace of these microtrends now matches that of fast fashion, or what’s now known as “ultra-fast fashion,” (…) When a certain style or product goes viral on TikTok, that item will often be sold out by the time the video is seen by the most amount of people. - Fashion is just TikTok now by Rebecca Jennings
출처: https://www.vox.com/the-goods/22911116/tiktok-couture-fashion-trends
이 '울트라 패스트 패션'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곳에서, 찰나의 순간 동안 보이는 옷의 이미지만 가지고 우리는 옷을 바라볼 수 있을 리 만무하다. 15초 동안 우리는 옷을 살펴볼 수 없다. ‘지금 유행하는 스타일’을 대략적으로 포착할 수 있을 뿐이다. 위 기사에서 "microtrend"라고 설명하는 이 짧은 유행에 1초라도 먼저 편승해야 하는 세상에서 디자이너의 생각과 표현은 무용하다. 해당 스타일의 미학, 기원, 아카이브를 보유한 디자이너 등이 다 무슨 소용인가. 초 단위로 파편화된 ‘패션’과 정방형 프레임에 갇힌 옷에서 그런 것들에 대한 온라인 담론을 기대할 수는 없다.
소셜 미디어에서 나아가, 패션 산업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미래가 되어버린 메타버스라면 어떨까. 프로그래밍 같은 기술적 영역에 대해 첨언하기 어렵지만, 감히 사견을 얹어보자면 이 가상현실에서 현실의 물리학 법칙이나 '현실의 몸'과 같은 형태를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면, 그곳에서의 행동 양식 역시도 현실에서의 그것과 자연스럽게 달라질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패션 디자인 관련 기술 및 지식 - 신체 비율, 패턴 제도, 섬유 과학 등 - 들이 쓸모가 있을까. 조금 더 과장하자면, 몸에 대한 개념 자체를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몸은 새로운 몸짓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게임 캐릭터의 움직임이나 CG를 활용한 영화 속 주인공의 움직임이 현실에서 재현 가능했던 것들인지 떠올려보자.
그렇다면 이 같은 상황에서 옷과 패션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사실 이미 우리는 가상현실 속 옷에 대해 익숙하다. 최근 들어 명품 업계의 게임 진출 - 루이비통의 리그 오브 레전드 컬렉션, 발렌시아가와 포트나이트의 협업 등 - 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우리의 첫 디지털 의상 구매는 게임 아바타 의상을 통해 이루어졌다. 물론 지금은 이렇게 단순하게 굴러가지 않는다. 작금에는 아바타 개념에서 나아가 디지털 의류를 현실의 사진(심지어 현실을 포착한 사진은 과연 현실과 같다고 볼 수 있는가?) 위에 렌더링 하거나 의류 디자인 파일, 프로그램 따위를 판매하는 일도 포함된다. 과연 옷은 점점 파편화되어가고, 패션은 점점 자신의 가능성을 넓히고 있다. 패션 업계가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환상을 팔아오다 보니 이제는 환상만 남아 결국 옷은 아무래도 상관없게 되어가고 있다. 심지어 디지털 세계에서는 사람의 몸이라는 기본적인 제약도 사라진 터라 환상을 구현하는 일이 더욱 쉽다.
옷과 패션의 분리를 지금처럼 계속 관망하고 있어도 되는 걸까. 확실히 게임 산업을 통해 디지털 패션은 이미 대중들에게 친숙해졌고, NFT, 블록체인, 메타버스 같은 것들로 과도기를 거쳐 방향을 잡아가려고 하는 모양새다. 하지만 다시 글의 시작으로 돌아가, 적어도 이런 글을 소비할 사람들은 우리가 입는 ‘옷’을 좋아하리라 생각한다. 산업의 발전, 패션 디자인의 확장, 다 좋다. 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옷과 착용이 주는 즐거움이고, 이 즐거움이 이 영역을 여기까지 이끌어왔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옷은 사라지고 패션의 이미지들만 교체되고 있는 현실을 내버려 둔다면 머지않아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옷을 입는다는 개념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실체가 없는 환경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몸에 맞추어 옷을 입을까. 현실의 몸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 환경이라면, 옷이라는 실체는 없고 프로그래밍된 언어만 떠다니는 곳이라면, 그저 자신들의 이상 속에 있는 체형을 불러와 지금 순간 유행하는 옷을 입혀 인생네컷처럼 기록이나 남기면 될 일 아닌가. 이미 상황은 변하고 있다. 현실이라면 최소한 옷들의 사이즈라도 분류하고, 사람의 체형들을 고려해 몸의 다양성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옷이 사라지고 몸이 사라져 패션만 남은 곳에서 그런 ‘수고로움’이 필요한가. 사람의 몸을 통일하면 될 일이다. 아래 사진만 봐도 이곳에 ‘옷’이 있는가. '인체'와 몸의 다양성이 있는가.
사실 메타버스에 옷 같은 게 필요가 있긴 한가. 브랜드가 좋다면 그냥 몸통 자체가 루이비통이나 롤렉스가 되어 버리면 되지 않을까.
출처: https://www.fashionboop.com/2356 [fashionboop: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