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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무요 Jul 10. 2022

13. "Cut-Out"은 무엇을 잘랐을까.

원단을 재단했을까, 우리의 몸을 재단했을까.

복근, 쇄골, 골반, 가슴, 등...


과연 어디를, 얼마나 드러낼 수 있을지에 대한 경쟁이라도 하듯이, 패션계는 전염병을 핑계로 편한 옷만 찾던 지난 세월에 대한 울분을 토하기로 작정한듯한 2022년을 보내고 있다. 손에 잡힐 듯한 전염병의 종식과 함께 돌아오는 파티 문화와 밤을 즐기기 위해, 사람들의 계정이 아니라 진짜 사람을 만나는 순간을 위해, 과감한 드레스들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기로 한 모양이다. 아쉽게도, 다양한 사람들이 한 데 모이는 파티와는 다르게, 이 파티룩들은 컷 아웃 아래 통일되어 과감함 사이에서 다양성을 찾기란 쉽지 않다.


Filippo Fior/Gorunway.Com, Salvatore Dragone/Gorunway.Com, Daniele Oberrauch/Gorunway.Com

*왼쪽부터 Off-White / AMBUSH / AMBUSH / Nensi Dojaka


그만큼 컷 아웃은 최근 패션계를 휩쓸었다. 다만 해당 기법을 차용한 디자이너들의 의상들이 유니클로 히트텍처럼 서로 다를 바 없다는 비약은 금물이다. 모두가 트렌드를 만드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겠지만, 사실 트렌드를 이끄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바가 트렌드를 잘 읽어내고 수용하는 것이 아닐까. 애초에 모두가 트렌드를 주도한다면 과연 그것을 트렌드라고 칭할 수 있을까. 더욱이 컷 아웃이야 말로 디자이너의 실험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기법이자, 패션 디자인이 주는 즐거움을 그대로 관람할 수 있는 디자인 중 하나다. 즉 같은 트렌드 안에서도 다양한 변주를 보여줄 수 있다.


이유인즉슨 원단은 종이와 달라 늘어나기도 하고, 부직포의 성질을 갖는 원단(대표적으로 가죽.)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실의 교차로 제직 되기 때문이다. 늘어난다는 성질은 달리 말해 자르는 순간 잘린 면적만큼 줄어든 중량 탓에 옷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받는 중력이 달라져 처짐의 위험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실로 제직 된다는 점은 자르는 순간 해당 단면에서는 실이 풀어질 수도 있고, 그만큼 사용할 수 있는 원단에 제한이 많아진다는 뜻이다. 더욱 과감하고 세밀한 컷아웃이 시도될수록, 디자이너에게는 그만큼 철저한 계산이 요구된다.


따라서 컷 아웃을 시도하는 모든 디자이너들의 감각과 계산에 따라 디자이너의 실험은 달라지고, 그만큼 결과물들도 다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디자이너들의 철저한 계산 탓에 패션의 다양성은 사라져 가고 있다. 디자이너가 철저한 계산을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디자이너가 염두에 두고 있는 '구체적인' 신체 모양과 사이즈가 결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체 비율이 달라지면 디자이너의 의도와 다른 부분이 노출될 수 있고, 체형이 다르면 디자이너가 의도치 않은 부분에서 원단이 늘어나 디자인이 왜곡된다.


결론적으로, 기존 '주류' 모델 사이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2022SS 패션쇼들을 돌이켜보면, 플러스 사이즈 모델은 전체 캐스팅의 1.81%만 차지했다. 물론 지난 FW에 비해 통계상 4배 이상 증가한, 유의미한 수치이기도 하지만 아직도 부족하다는 점 역시 부인할 수 없다.

(출처: https://www.thefashionspot.com/runway-news/866530-diversity-report-fashion-month-spring-2022/)


당연히, 컷 아웃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컷 아웃된 옷들은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즐거움만큼이나 우리에게 디자인적 즐거움을 가져다주었기에 폐쇄, 격리와 같은 단어들에서 멀어지는 오늘을 기념하기 위해 적합한 디자인이다. 하지만 책임에서 자유롭게 둘 수만은 또 없는 노릇이다. 아직까지는 인체의 다양한 크기를 대변할 수는 없는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전염병 이전의 과거로 돌아가면서 시계를 지나치게 많이 돌린 탓인지 사람들은 모두 Y2K를 그리워하고 있다. 신체를 더욱 드러내는 것 역시 이 향수의 일부다. 물론 당시의 미학이 있고, 당시의 패션이 만들어 낸 즐거움이 분명 있지만, 때로는 과거에 남겨두어야 할 미학도 분명히 존재한다. '기준'을 충족시키는 모델들이 컷 아웃을 반복적으로 착용하고, 사람들이 열망하는 브랜드들이 반복적으로 컷 아웃을 발표한다면 우리는 결코 패션계의 획일화된 체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같은 흐름은 패션화 된 몸에 대한 우상화를 강화시킬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컷 아웃 탓은 아니다. 애초에 패션 디자인이 생각하는 신체가 보다 확장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보다 많은 신체들을 고려했었다면 컷 아웃 역시 이에 맞추어 옳은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었을 테다. 애초에 디자인적 관점에서 직물과 편성물에 관계없이 시도할 수 있는 기법인 동시에 신체의 움직임에 따라 옷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옷과 몸의 조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기법은 그리 많지 않다. 다만 Sinéad O'Dwyer의 표현을 빌리자면, 컷 아웃의 문제는 '작은' 신체를 바탕으로 디자인되었다가 나중에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I think the problem with this trend,” she says, “is that the design is being created for a smaller body and then just being scaled up. (...) The model of operation has almost been to make the consumer customise their own bodies via dieting etc. rather than considering that all bodies are different. - Sinéad O’Dwyer


Source: https://i-d.vice.com/en_uk/article/z3nnzj/cut-out-fashion-body-inclusivity?utm_source=twitter


사실 이는 컷 아웃의 문제라기보다는 패션 디자인의 문제라고 일컫는 편이 더 옳다. 패션 디자인이 더 다양한 몸을 고려해왔다면, 패션화 된 몸이 아니라 그냥 '몸'을 고려해왔다면, 상황은 달랐을 터이다. 컷 아웃이라는 트렌드에 누구나 쉽게 접근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패션의 즐거움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누릴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언제나 현실은 이상과 다르고, 역사에서 가정은 소용이 없다. 우선 지금의 컷 아웃을 바라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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