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으로 구멍 난 내 마음속 트리거 찾기.
상담과 정신과 진료를 병행했던 6월은 54kg까지 살이 빠졌다. (2월엔 63kg이었다.)
급격하게 살이 빠지고 먹는 게 줄고 잠을 못 자다 보니 좀비처럼 겨우 기운을 짜 내서 활동할 수 있었다.
10%가 남은 저전력배터리처럼 빨간 불을 켜고 최소한의 활동을 했던 삶.
쉬는 시간에는 복도에서 나오는 욕설을 듣기 싫어 건물 밖으로 나가 해를 쬐었고, 너무 몸이 안 좋을 때는 사무실 책상에 널브러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약물 중독자처럼 약을 먹어야 마음이 편했다.
아이들에게도 최소한의 예의만 차리고 할 수 있는 것의 아주 작은 일들만 했다.
그렇게 퇴근을 하면 해가 질 때까지 가만히 소파에 누워 있었고, 해가 지면 씻고 침대에 누워 달이 질 때까지 누워 있었다.
책을 읽을 힘조차 없어서 누워 있다가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들었다.
눈을 감기 전에 감사한 것 세 가지를 생각하고 잠을 청했다.
그때 나는 살아있지 않았다.
죽어가는 자에게 떨어져 나갈 가는 숨처럼 숨을 붙였다 뗐다 하며 지냈다.
우울증이 심해서 아침저녁으로 항우울제인 푸록틴을 먹었고 기력이 없어 저녁엔 아빌리파이를 처방받아먹었다.
학교에 갈 생각을 하면 너무 불안하고 무서웠다.
일하던 학교는 규모가 커서 출퇴근 길 주변에 학생이 많았는데 그때는 재단 학교의 교복만 보아도 무서웠다.
학교에 갈 생각을 하면 몸이 떨리고 식은땀이 났다.
이를 다스리기 위한 항불안제인 자나팜은 아침과 자기 전에 먹었다.
약이 잘 맞았는지 6월이 지나면서 스트레스로 올라오던 위산이 항불안제 덕분에 멈추게 되었다.
8-9시에 잠들면 식은땀을 흘리며 새벽 네시 반 즈음에 깨긴 했지만 그래도 잠을 잘 수 있어서 감사했다.
몸이 서서히 나아가면서 집을 나갔던 생각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망가지도록 나는 나를 방치했구나.
언제부터 나는 이렇게 망가지게 된 걸까?
10년 동안 한 해도 빼놓지 않고 공사립 임용고시를 보았다.
내 공부 방법이 잘못된 건지 공립 시험에서 1차를 합격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노량진에서 지내던 기간이 3년을 넘어가던 시점에는 어디든 가고 싶어 사립 시험도 함께 보았다.
임용이 절박하던 때에는 경기 권의 학교까지 멀리멀리 다니며 사립 임용시험을 보러 다녔다.
트로트 행사를 뛰듯 파주부터 성남까지 가지 않은 학교가 없었다.
그리고 묘하게 필기나 면접이 붙었었다. 그리고 묘하게 떨어졌다.
첫 기간제도 한 번 떨어졌던 학교를 다시 지원해서 두 번째 해에 합격을 할 수 있었다.
4수부터는 공부만 할 수 없어 일과 공부를 병행했다.
기간제를 지원하기 위해 2-300개의 자소서와 지원서를 넣으며 생각했다.
정말 쉬운 게 하나도 없구만!
첫 기간제로 들어갔던 사립학교는 풀 한 포기 없는 삭막하고 고루한 느낌의 고등학교였다.
아이들이 담배를 피우던 자리에 금연 프로그램으로 상추와 깻잎을 심었던 학교.
학생부여서 쉽지 않았지만 아이들이 무난했고 고등학교 수업은 임용 공부와도 연결이 되어 있어 일하기에 나쁘지 않았다.
하반기엔 아이들이 자습을 할 때 나도 같이 임용 공부를 했다.
그중에 나만 건강을 잃었다.
건강을 잃고 재계약 시즌이 되었을 때였나.
'화장을 진하게 하지 않고, 고 분 고 분 하 게 말을 잘 들으면 재계약을 고려하겠다.'는 깐깐한 교장 선생님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또다시 100개의 이력서를 뿌리기 시작했다.
경력이 생기니 그나마 두 번째 기간제 구직이 수월했는데 서울에 있는 지금의 근무처로 옮기게 되었다.
아이들이 힘든 편이었지만 사연이 많아 불쌍했고 선생님들이 좋은 학교였다.
여기는 재단도 큰 편이라 회사 같은 느낌을 주는 게 오히려 좋았다.
아무것도 몰랐던 사노비는 여기서 열심히 일해서 티오가 나면 정교사에 합격하자는 꿈을 품게 된다.
그렇게 6년을 일하고 교과에 티오가 나서 교육청 위탁 시험을 치렀다.
1차 시험을 꽤 괜찮게 봤다. 그리고 2차 수업 실연을 했고 3차에 가지 못하게 됐다.
떨어졌다. 2022년 1월이었다.
그 해에 내 교과는 무려 세 명을 뽑았는데 고등학교에서 일하던 능력 있는 기존 기간제와 다른 두 명의 새로운 지원자들이 합격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내 자리는 없었다. 재단이 큰 만큼 같은 생각을 했을 기간제가 수도 없이 많았을 텐데, 우습게도 난 그걸 깡그리 무시하고 있었다. 필기시험을 잘 봤으니 오만하게도 당연히 될 줄 알았다.
불합격 소식을 듣고 생각해 보니 수업 실연이 깔끔하지 못했다. 중학교에 특화된 수업을 했던 나는 고등학교 실연 문제에서 그렇게 능숙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만큼 간절해서 더 열심히 했을 사람들을 잊고 있었다.
수 백 번의 불합격 소식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았던 나였는데, 어리석은 나를 책망하고 싶었는지 애도도 하지 않고 애먼 총구를 가슴에 겨눈다.
'탕!'
상상 속의 나는 심장이 터지고 찢어진 살점과 파편이 낭자하게 흩어진다.
고꾸라진 몸에서 울컥울컥 피가 새어 나왔다.
그렇게 나는 두 번 다시 일어설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총 맞은 것처럼~을 흥얼거리며 나는 그 이후로 임용 시험을 두 번 다시 보지 않았다.
불합격을 하고 슬퍼할 사이도 없이 나는 3월에 재계약이 된 채로 학교에 돌아갔다.
그렇게 우울증과 함께하는 봄을 보내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내 트리거는 불합격이 아닐까 싶다.
재단 시험이 트리거가 되었지만 어느 순간 교직 자체에 대해 불합격을 받았다는 기분이 든다.
불합(不合).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어떻게든 끼어 앉아보겠다고, 한껏 꾸미고 온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느껴졌다.
내가 교직에 어울리는 사람인가?
남들은 애엄마가 되어 영유냐 일유냐 유치원 같은 걸 고민하던 시기에 나는 나에게 물음표를 던졌다.
정말 나 선생님 하고 싶었던 거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