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떻게 오셨나요?
과일맛 카운슬러에서 했던 상담은 5월 말부터 시작해서 매주 월요일 저녁 8시에서 7시, 10회기로 이루어졌다.
기본적으로 상담은 10회기가 기본이고 상태나 내담자의 요구에 따라 12회 15회 등으로 늘려서 한다고 했다. 나는 중간에 여행을 가고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인해 8월 중순이 되어서야 10회기로 마칠 수 있었다.
정신과 선생님은 2주에 한 번씩 뵈었고 상담 선생님은 1주일에 한 번씩 만났다.
정신과 선생님께서 나의 극적인 변화를 캐치하셨다면, 상담 선생님은 나의 점진적인 변화를 보실 수 있었을 것 같다.
선생님의 질문은 항상 '어떻게 오셨나요?'로 시작했다.
'오늘은 건강을 위해 집에서 걸어왔습니다.'라든가 '오늘은 버스를 타고 왔습니다.'로 대답을 했고, 한 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일을 겪으며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이야기를 하는 한 시간이었다.
상담 초기에는 일을 할 수 없는 절망적인 마음과 일에 대한 나의 느낌을 한풀이하는 시간이었다.
학교에서 지낼 때 언제가 가장 힘든지, 무엇이 가장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고 발표하는 시간.
그 과정에서 일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되었던 시험에 대한 좌절, 내 트리거 등을 쏟아내느라 힘이 들었다.
상담 중기에 들어서부터는 내 인생의 목표가 나에게 맞춰진 게 아니라 가족의 기대에 맞춰진 것, 가족에게 내가 느끼는 감정들에 대해 쏟아내고 있었다.
부모와 남편, 나의 곁에서 뗄 래야 뗄 수 없는 인물들에 대한 해묵은 감정을 똑바로 보는 게 힘이 들었다.
그 과정에서 늘 눈물이 쏟아졌다.
원래도 눈물이 많은 나는 상담실에 놓인 미용 티슈를 한 다발 뽑아서 쓰고, 정수기 물을 받아다 마시면서 눈물로 빠져나간 수분을 보충했다.
'윤강님은 꼭 모두의 의견을 수용하고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네요.'
그랬다.
거절하는 법을 몰랐다는 걸 알게 됐다.
학부모의 말이 칼처럼 꽂힐 때 나는 그 칼을 맞으면서 피가 솟구치는데도 그의 앞에서 죄송합니다만 반복하고 있었다. 가끔은 안 된다고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줄도 알았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시험을 포기해도 된다는 엄마의 말을 들어도 내가 듣지 않았다.
진짜 포기해 버리면 누구보다 가족이 아쉬워할 것 같아 그만두지 못했다.
'우리 딸은 서울에서 교사를 하고 있다.'는, 그 어깨를 으쓱거리게 하는 말을 그들의 입에서 떠나게 할 수 없었다.
아, 우리 엄마 아빠도 그렇게 하란 적이 없었는데 내 스스로 '그건 나를 곱게 키워준 부모에 대한 모독이다!'라고 생각해 버렸다.
그래서 내 스스로 그냥 무식하게 육신을 갈아가며 일을 참고 했다.
그러니 다리가 잘린 채 걸어가는 기분이 들지.
늘 갈증이 나는, 타는 목마름이 있었는데 인정에 대한 욕구나 칭찬 같은 것들이었다.
상담을 하며 지나고 나니 그런 것들에 내가 무척이나 애를 쓰고 있었다는 걸 자연스럽게 깨닫게 됐다.
과거에 꽁꽁 묶어둔, 배배 꼬인 나 자신과 화해를 하는데 석 달이 좀 넘게 걸렸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귀가 밝고 예민한 편이다.
그리고 잘 몰랐는데 상대의 반응에 민감하다.
(어쩔 수 없다. 둘째가 그렇지 뭐.)
눈치 살피기 무형 문화재인 나는 과일맛 상담을 하는 시간에서조차 선생님을 조용히 관찰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라든가 선생님이 내 말을 들으면서 삼키는 내적 트림이라든가.
그 와중에 선생님의 부른 배가 신경이 쓰인다.
원피스를 주로 입고 오시는 선생님의 부풀어 오른 원피스 자락.
선생님께서 임신 중인 건 아닌지 염려가 되었다.
또 어느 회기에는 배가 평평해 보이고, 어느 날은 조금 부풀어 보였다.
잘못하면 뱃속의 지방을 아가로 오인할 수 있으니 말을 아끼기로 한다.
자잘한 것에 신경이 곤두서지만 그 외로 선생님은 정말 놀랍도록 차분하게 내 말을 잘 들어주셨다.
내가 선생님의 배에 꽂힌 동안 선생님은 별개로 상담에 매우 집중해 주셨다.
지나치게 수용적이거나 내 마음에 깊이 공감해 주는 리액션을 취하지도 않으셨다.
그 담백한 표정과 반응이 나를 편하게 만들어주었다.
끔찍했던 5월에 비해 약이 들으면서 여름엔 눈에 띄게 나아졌다.
약과 함께 상담을 병행하니 일상생활을 차근차근 회복하게 되었고, 그 덕에 여행도 다녀오게 되었다.
내가 점점 밝아지니 선생님의 표정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선생님도 조금 더 유해지고 같이 밝아지신 기분이 들었다.
타인의 반응에 민감한 성격이다 보니 선생님이 행복해하시니 나도 절로 행복해졌다.
나를 위해서 내 스스로 행복해지는 법을 알아야 하는데, 나는 아직도 타인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짐을 느낀다.
어쩔 수 없다. 네가 웃으면 나도 좋아.
심리 검사를 마쳤고 개학을 앞둔 시점에서 10회기를 맞이했다.
10회기의 상담 시간에 선생님께 상담 중단을 요청했다.
그 시기에는 일보다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던 상태여서 선생님께서 짐짓 놀라는 눈치셨다.
10회기는 다 하였으니 남은 회기동안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도 된다고 하셨다.
하지만 여름의 나는 상담이라는 둥지를 떠날 준비를 하고, 가을이 오기 전에 그 둥지를 떠나 세상으로 날아갔다.
가을에 다시 그렇게 아파질 줄은 몰랐지만 8월 말에는 몸이 회복하면서 아이를 가지면서 자연스레 일을 그만두는 그림을 그렸'었'다.
그래서 마지막 시간에 자연스럽게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내 또래였던 선생님에게 상담을 마무리하며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여쭤보기도 했다.
지나고 나서 이야기를 하셨지만 상담 선생님이 나를 상담하던 시기가 선생님의 임신 초기 기간과 맞물렸다.
계획하지 않은 임신이었고 상담 초기인 5월에 생겼던 아이여서, 그동안 선생님이 보였던 옅은 하품과 신물을 힘들어하는 게 그제야(!) 이해가 됐다.
옷인지 뱃살인지 아기인지 헷갈리던 선생님의 모호한 배도 여름이 지나면서 선명해졌다.
서서히 불러가는 배를 보고 미안한 마음이 생겨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개의치 않아 하셨다.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 의미가 있었다고, 윤강님의 말이 영향을 주지 않을 테니 걱정 말라고 나를 안심시키는 사람.
아니요, 선생님이 오히려 저를 살리신 거예요.
선생님이 없었다면 저는 죽었을지도 몰라요.
진심으로 선생님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은 푸른 용의 아이를 기다릴 박*진 선생님의 가정에 행복과 사랑이 가득하길 기원한다.
만 오천 원의 행복!
(물가가 올라서) 삼겹살 1인분의 가격!
치킨 반 마리의 기적!
나조차도 외면했던 내 내면의 말을 꺼내게 해 준 사람.
대나무숲처럼, 부처님처럼 묵묵히 들어준 사람.
현대인에게 상담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이 든다.
벽이나 소의 귀에다 외치지 말고 내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에게 외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