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 맛 카운슬러에서 받았던 상담들.
내가 다녔던 과일 맛 상담센터는 홍대의 옷가게거리에 있는 작은 스터디룸 같은 곳이었다.
다녔던 병원의 분위기처럼 차분하디 차분한 공간에서 기다리다가 노크를 세 번 하고 상담실로 들어가면 1:1 과외를 받는 것 같은 공간에서 상담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게 된다.
처음엔 개인 신상 정보를 적고 상담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상담 과정에 대해 안내를 받게 되었다.
상담사와 내담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상담은 비밀 보장이 된다든가, 자살같이 위험 신호가 느껴질 때에는 적극적인 개입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 상담자가 느끼는 것 이상으로 내담자의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전문가에게 의뢰가 될 수 있는 그런 내용들이 채워져 있었다.
항상 상담은 '오늘은 어떻게 오셨나요?'로 시작해서 내가 했던 일들에 대한 수용과 존중, 지지의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선생님을 만났던 초기 상담은 내가 우울증이 극심했던 상태여서 상담에 오는 것 자체가 잘한 일이 될 정도였다.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고 어떤 것에도 흥미가 생기지 않았던' 상태여서 나를 살리기 위해 상담에 온 것 자체가 용한 일이긴 했다.
그렇다고 선생님께서 우쭈쭈 같은 느낌으로 칭찬 샤워를 해준다거나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묵묵하고 담백하게 반응해 주셔서 그 점이 좋았다.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 칭찬을 할 것은 칭찬을 해 주셨다. 그리고 존중을 해 주실 건 존중을 해 주셨다.
그렇게 머리가 돌지 않아 ‘죽고 싶다.’나 ‘우울하다.’로 똘똘 뭉쳐있던 생각의 실뭉치를 조금씩 풀어내주셨다.
이건 우울한 게 아니라 화가 나는 것, 이것은 불쾌했던 것, 이것은 슬펐던 것 등으로 감정을 세분화하고 구체화하는 과정이 있어서 훨씬 더 우울이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내 감정을 구체화하는 것.
단순히 힘들고 우울하다로 묻어버리면 편한 것들을 일일이 파헤쳐서 해체하고 선생님 앞에 전시를 해야 했다.
그중에는 수치스러운 것도 있고 숨기고 싶은 것도 있고 묻어버리고 싶은 것도 있지만 얄짤없이 적나라하게 하나하나 살펴보고 탐구해야 했다.
상담을 하고 나면 늘 진이 빠졌다.
삶이 바쁘다는 핑계로 내가 꾹꾹 눌러 담아 놓은 감정들을 해부해야 했는데 보통 일이 아니었다.
꽉꽉 눌러놓은 김치가 터지듯 내 감정은 터져서 파편이 튀었다.
그렇게 조각난 것들을 다시 하나하나 주워서 정리하고, 짜깁고, 다시 세우는 10주의 시간이었다.
선생님과의 상담을 통해 알게 된 나는 상당히 에너지가 넘치고 열정적인 사람이라는 것, 불안해서 불안함을 메우기 위해 또 무언가를 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가만히 누워 있는 사람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나요?'
'가만히 누워 있는 사람을 보면 게을러 보여요. 하루종일 누워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윤강님이 가만히 아무것도 누워있다고 생각하면 무슨 생각이 드나요?'
'가만히 누워 있는 게 불안하고 불편하게 느껴져요. 바로 일어나서 무언가를 해야만 할 것 같아요.'
가만히 있는 것에 대한 불안함을 많이 호소했다.
주변에서 누워 지내는 사람은 우리 언니뿐이었다.
언니는 잠도 많고 행동이 느린 편이라 주토피아의 나무늘보처럼 다른 속도로 사는 사람이다.
그녀가 누워 있는 모습조차 나는 볼 수 없었다. 언니가 누워 있는 동안 나는 밖에 나가서 친구와 놀거나 알바를 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지금도 내가 누워 지내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집안에 누워 지내는 사람이 없었다.
엄마는 바빠서 항상 뭔가를 하고 계셨고 아빠는 바깥일이 바쁜 만큼 누워 있지도 못하고 소파에서 쪽잠을 주무시곤 했다. 똑같은 부모 아래 태어난 아이는 셋인데 여유를 불안해하며 분주하게 움직인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런 부모님을 보며 언니는 누워 지내기로 하고 나는 불안해하며 다른 일을 하고 동생은 동생은 나름대로 움직였던 것 같다.
어렸을 땐 똑똑하고 잘난 언니와 존재 자체가 3대 독자라 유의미한 남동생 사이에서 내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서 발버둥 쳤다.
아들 낳는 한약을 먹고 태어난 종갓집의 둘째 딸.
할머니는 엄마가 먹을 미역을 사러 갈 때 딸이어서 늘 기운이 빠졌다고 하셨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는 언니처럼 인정받고 싶어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 커서는 직업이 불안정해서 열심히 살 수밖에 없었다. 대학을 가서도 할 것이 많아 본가에 가지 않았고 졸업을 하고 나서는 고시 공부 때문에 쉬지 못했다.
그 결과가 좋든, 안 좋든, 나는 무식하게 달리고 있었다.
회사에 가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선생님께서 여쭤 보셨다.
나는 다리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잘려서 걸어갈 수 없는 기분이라고 답했다.
다리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다리가 잘렸는데 어떻게 걸어가라는 거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도마뱀의 꼬리처럼 다리가 새로 돋아나면 좋으련만, 내 다리는 그럴 리도 없다.
나는 그렇게 잘린 다리를 붙들고 피를 흘리며 시들어가고 있는 느낌이라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나를 다독여주셨다.
집이든 아이든 직업이든 뭐든, 해야 할 게 많아 초조해하는 나를 두고 다시 일어나기 위해 회복하자는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그런 상태를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하게 하셨고 내가 하지 않았던 방법과 일에 대해 생각을 열도록 도와주셨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것.
하루종일 누워 있어도 시간은 잘 흘러가고 나는 그대로 있다는 것.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다는 것.
가만히 누워 있어 보기로 한다.
우울증 때문에 힘이 거세된 와중에도 나는 우울증을 이겨보겠다고 무식하게 운동을 다니고 글을 쓰고 뭔가를 계속하고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해 보지 않았던 여름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여름은 잘 갔고 심지어 평온했다.
가만히 누워 있어도 괜찮다.
심지어 편하다!
그 단순한 걸 나는 우울증이 걸리고서야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