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리조나의 인디언 보호구역 여행기
Utah에 위치한 Airbnb에서 무사히 밤을 보내고, 다음 목적지가 있는 Arizona로 향할 차례였다. 우리가 묵은 숙소에서 다음 목적지인 Horseshoe band까지는 2시간 30분가량 운전해야 했고, 제법 거리가 있었다.
기나긴 운전 끝에 Horseshoe band의 주차장에 내렸지만, 내가 인터넷에서 봐왔던 그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이곳은 국립공원이 아닌 독립된 장소라서, 우리가 갖고 있던 국립공원 연간 이용권으로는 입장이 불가능했고, 별도로 입장료를 지불해야 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한 20분 정도 걸었을까?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 보였고, 그곳에서 마주한 거대한 절벽 아래에는 강이 말발굽 모양으로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물이라곤 없을것 같던 사막 한가운데에 물이 이렇게나 많이 있는것이 기본적으로 신기했다. 그래도 서부에 가뭄이 한창 이슈일 때라서인지,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수위가 조금은 낮아진 것처럼 보였다. 안전 목적으로 난간이 있긴 했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난간이 없는 곳에서 아슬아슬한 사진들을 찍고 있었다. 그렇다고 누가 난간 없는데에서 위험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못 가게 하는 안전요원도 따로 없었다. 혹시나 해서 밑을 내려다보니 정말 아찔했다. 자유의 나라인 미국은 기꺼이 위험을 감수할 자유도 보장되는것 같다.
날이 꽤나 더웠고, 근처에 그늘조차 없는 곳이라서 더욱 오래 있지는 못했다. 인근에서 점심을 먹은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Antelope canyon이다. 이곳 역시 국립공원이 아닌 별도의 장소인 데다가, Navajo nation(나바호 인디언 자치구역) 안에 있는 곳이다 보니 출입절차도 다소 까다로웠다. 한창 극성이던 코로나에 원주민들이 감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문진표랑 서약서 같은 것을 작성하고 마스크도 착용해야 했다.
우리 일행은 오후 1시 입장을 위해서 시간 맞춰 장소에 도착했고, 때마침 입장하는 일행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오후 12시 입장 일행이라는 팻말이 앞에 붙어있었다.
"아니, 12시 입장을 12시 30분이 넘어서 시작하는 거면 1시 입장은 얼마나 늦는 거야?"
라고 '아니시에이션'을 구사하며 불평하며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12시 입장 행렬이 거의 1시가 다 돼서야 입장하자,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해 Ticket office에 가서 1시에 예약한 사람들은 언제 들어가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돌아온 답변은 생뚱맞게도, "아직 1시 안됐는데?"였다.
아뿔싸, 인디언들은 Summer time을 적용하지 않는구나
미국에서는 Summer time이 적용되면 기준 시보다 1시간 정도 시간이 당겨지고, 이로써 사람들은 길어진 낮시간을 좀 더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된다. 핸드폰 시간도 그래서 Summer time에 맞춰져 있고, 일상생활 속에서 Summer time 적용 여부는 핸드폰 시계와 자동차 시계가 1시간 차이 날 때 뒤늦게 알아차리는 편이다.
하지만, Navajo nation은 인디언 보호구역이고, 그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Summer time이 그들의 일상에 침투하는 걸 거부했나 보다. 간단히 말해, 우리 일행은 1시 입장이라는 것만 기억하고 핸드폰 시간에 맞춰서 도착을 한 건데, 그때가 Navajo nation의 시간으로는 12시였던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뜻하지 않게 남아돌았고, 우리는 이후 일정에 필요한 시간 소모를 줄이기 위해 인근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다시 돌아왔다. 한여름에 Antelope canyon에 가게 된다면 Summer time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꼭 참고하길 바란다.
한편, 입구 쪽에는 작은 컨테이너 박스처럼 생긴 사무소가 있었고, 바로 옆 기둥에는 상당히 익숙한 한글을 볼 수 있었다. 우습게도 그 글자는 '금연'이었다. 미국에서 한국어로 된 간판은 종종 봤지만, 이렇게 '금연'표시가 쓰인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한쪽 기둥엔 한국어, 반대편 기둥엔 중국어로 표기가 되어 있었다. 동양인 관광객을 좀처럼 찾기는 어려운 편이었는데, 그 몇 안 되는 동양인 중에 한국인들이 담배를 꽤나 많이 태웠나 보다.
하긴, 세계 각국의 학생들이 모인 학교 캠퍼스에서도 한국인들이 유독 담배를 많이 소비하는 것을 보면, 사실 쉽게 납득이 가는 현상이었다.
Navajo nation에 들어갈 때에는 상당히 주의사항이 많았다.
1. 사진 촬영은 되지만, 동영상 촬영은 안된다.
2. 작은 가방도 들고 들어갈 수 없다.(차에다 두고 내려야 함)
3. 마스크를 쓰고 입장해야 한다.(COVID로부터 원주민 보호 목적)
4. 원주민 가이드가 가라고 하는 곳까지만 갈 수 있음, 눈 밖으로 벗어나면 당장 돌아오라고 함
5. (당연한 거지만) 노상방뇨, 쓰레기 투척 금지, 금연
게다가 신기한 건 차를 타고 입장하는 건 맞지만, 독단적으로 운전을 하여 출입하는 건 불가능했다. 입장하는 시간대별로 관광객들의 차량이 줄을 서 있고, 그 행렬의 맨 앞쪽과 뒤쪽에 현지인들의 가이드 차량이 1대씩 이동한다. 통제된 구역에서만 하차를 할 수 있고, 가이드가 가지 못하게 하는 곳은 갈 수가 없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Canyon에 입장하면서부터는 마스크를 착용해야 했다. 오랜만에 쓰는 마스크인 데다가 무더운 여름이라서 상당히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들에게 우리는 어디까지나 위험하고 낯선 이방인이니까.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서 계곡 안쪽으로 들어가니 우리가 생각한 바로 그 모습들이 보였다. 앞서서 본 국립공원들에서는 그저 거대하고, 조금은 투박하고, 다소 규칙적인 모습의 자연물들을 봐왔다면, Antelope canyon의 모습은 거대하진 않지만, 섬세함이 느껴지고, 규칙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자연이었다.
우리를 안내하던 가이드는 원주민이었고, 그다지 관광객들에게 친절해 보이진 않았다. 억양과 말투도 상당히 특이한 편이라 영어가 안 되는 나로서는 도무지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듣을 수가 없었다. 뭔가 하지 말라는 것도 많고, 어조도 보통 명령조 이다 보니 우리를 비롯한 관광객들은 불편한 기색을 숨길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이 더운 날에 말 안 듣는 외부인들을 데리고 다니길 무한반복하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Antelope canyon은 여러 섹터로 나눠져 있는데, 두 번째 섹터를 들어가기 전에 입구에서 갑자기 가이드가 아무 말 없이 무릎을 꿇고 땅바닥의 모래를 손으로 모아 산을 만들고 갑자기 그 위에 물을 부었다. 이 계곡 안에 그들이 모시는 조상신 같은 게 있어서, 감히 (원주민 입장에서)어리석은 이방인들을 들이기 전에 조상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통과의례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가이드가 갑자기 입을 열더니 누구 들으라는 지 모르겠지만 "비가 내리고, 물이 흐르면, 바위가 침식되고..."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응? 원주민도 제사는 영어로 지내나 보네?"
하면서 처음엔 어리둥절하다가 정신 차리고 다시 보니 Antelope canyon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작은 모형을 만들어 설명해주는 것이었다.(그러게 처음부터 뭐 하는 거라고 좀 설명이라도 해주지)
생성과정은 간단하다, 모래가 퇴적되어 만들어진 암석층이 있었는데, Flash flooding이라고 불리는 돌발적인 홍수가 주기적으로 발생하고, 이때마다 이 사막에 급류가 생성된다. 그 급류가 암석층을 깎아내고 나면, 그 위에 또다시 사막의 모래가 퇴적되고 급류가 깎아낸다. 이런 침식과 퇴적의 콜라보가 오랜 세월 동안 거듭되면서 이런 미스터리 한 지형을 만들어 낸 것이다.
Canyon 사이에 난 좁은 길목을 들어가는 건 마치 선물 포장을 찬찬히 뜯는 것 같은 기분이다. 좁고 굽은 길 덕분에, 안에 얼마나 멋진 장소가 숨겨져 있는지는 그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상상조차도 할 수가 없다. 몇 발자국 걸어서 마지막 코너를 지나 숨겨진 스폿에 도착하면 그제야 보이는 예상치 못한 그림에 감탄하게 된다.
어떤 곳에서는 가이드가 갑자기 멈추더니 삽으로 땅에 있던 모래를 퍼서 계곡 벽에 뿌렸다. 그 벽을 타고 흐르는 슬로모션으로 찍어도 좋다며, '한시적 동영상 촬영'을 특별히 허가해 주었다. 신기하게도 모래가 마치 물이 흘러내리듯이 부드럽게 외벽을 타고 흐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원리는 잘 모르겠다만, 그만큼이나 이 암석을 이루는 모래입자가 곱다는 것과, 암석의 표면이 완만한 곡선들로 이루어진 것을 실감할 수 있게 해 준다.
투어는 1시간 좀 넘게 걸렸던 것 같다. 생각보다 일찍 끝나버려서 뭔가 아쉽다가도, 덥고 건조한 날씨와 바닥에서부터 올라온 모래먼지, 그리고 마스크 착용 규정 때문에 조금은 쉬고 싶었다. 어차피 가이드의 철저한 통제 아래 움직여야 하다 보니 더 오래 있고 싶다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안녕, 반가웠어, 우리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을까?
미국에서 여행을 갈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특히나 이번 여행에서 National park나 자연경관을 보면서 더욱 진하게 드는 생각이다. 도시 여행이야 멋 훗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다시 올 수 있을 것 같지만,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몇 시간이고 운전해서 가야 하는 National park와 멋진 자연경관들은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만 같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든다.
가는 곳마다 하루 넘게 시간을 보낸 곳은 없지만, 짧은 시간만에 나를 매료시킨 곳들에 어느새 정이 들어버리곤 하는 나에게 이 장소들과의 작별은 마치 우연히 만났지만 죽이 잘 맞았던, 그래서 더 알고 싶었던 친구와 어쩔 수 없이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기분이 들게 한다. 하지만 모든 만남은 언제나 이별로 끝이 나는 법이다.
우리보다 일찍이 여행을 마치기로 한 J를 공항에 데려다주러 라스베가스로 돌아가는 길에 Grand canyon national park를 거쳐서 잠깐이라도 구경하고 갈까 했지만, 앞서 Antelope canyon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기는 바람에 결국 곧장 라스베가스 공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혼자서 힘들었을 텐데 그동안 말 못 하고 고생했던 J에게 약간은 미안한 마음과 함께 아쉬운 마음으로 작별인사를 하며, 무사히 귀국한 후 한국에서 또 만날 것을 기약했다.
학수고대하던 저녁 메뉴 선정의 시간이 돌아왔고, 체력을 다들 소진해버린 상태에다가 일행 한 명마저 떠나보내고 나니 갑자기 썰렁해진 기분을 채워줄 소울푸드가 필요했다. 마침 운전대를 잡고있던 H는 치킨에 맥주를 먹고 싶다는 극적인 제안을 했고, 나와 I도 그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침 라스베가스에 한국의 bbq치킨이 있다는 걸 알아냈고, 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이 냉큼 주문하고 픽업해왔다.
저녁을 먹으며 지금까지 여행에 대한 짤막한 소감과, 원래는 라스베가스 도심을 여행하기로 했던 이후 일정을 Grand canyon national park 여행으로 바꾼것에 각자가 참석할지 말지에 대해 토의를 했다. 일행 셋 중에서 나와 I는 인생에서 Grand canyon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 순간에 그곳을 못가고 지나쳐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가는걸로 마음을 굳혔지만, H는 아직 선뜻 마음을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앞서 Grand canyon이 가깝다곤 했지만, 그래도 운전하면 편도로 4시간, 왕복 8시간이 걸리는 일정이다 보니 쉽사리 강요할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에 동참을 거부하면 얼마든지 개인의 선택을 존중해줄 생각은 있었지만, 같이 못가면 상당히 아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결국엔 나와 I의 마케팅(이라고 쓰고 강요라고 읽는다)과, 그밖의 이유덕분에 동참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 서부여행의 나침반은 마지막 행선지인 Grand canyon national park을 가리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