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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쁜공감 Nov 18. 2021

슬픔을 쓰는 일

내게도 필요했던 애도의 시간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때의 마음을 쓰면서 나 자신을 위로했다. 마흔이 넘었고 나름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아팠던 어느 한순간도 기록되지 않은 적은 없었다. 방법이 조금 달랐고 기록되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에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일단 받아들여지고 정리가 시작되어야 기록할 수 있었다. 그렇게 끄적이기 시작하면 때론 마음의 박자가 더 빨라져 머릿속에서 미처 종결되지 못한 상황이 가슴속에서는 마침표를 찍었다. 그렇게 되면 그다음은 쉬웠다. 내 마음에서 정리가 된 대로 내가 써 내린 글처럼 내 생각도 갈피를 잡게 되는 것이었다. 그게 나만의 방식이었다.



그리 오래 걸린 적은 없었다. 되레 써내리기 전에 가슴속에서 증발해버려 머릿 속도 비워내야 할 때가 있었을 거다. 그렇다면 그건 굳이 내가 꼭 써야 했던 것이 아닌 것이었다. 가슴속은 끊임없이 부글대는데 도무지 정리라는 것이 시작되지 않아, 이렇게 긴 시간 써 내릴 엄두를 못 내고 있는 것은 아빠에 대해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아빠의 죽음에 대해서.



길지 않은 아빠의 투병기간 동안 나는 거의 매일 글을 썼고, 아빠와 이별하고 몇 주 지나고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다. 주로 내가 느끼는 아픔과 그리움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게 추억하고 아파하며 그리움이 절절한 글을 쓸 때마다 언젠가 내가 직접 맞닥뜨린 아빠의 죽음에 관해 글을 쓰는 날이 온다면 그즈음의 나는 비로소 내 마음을 추스를 수 있을 것이고 마냥 어린아이 같았던 애도의 첫 단계가 마무리되는 것일 거라 예측해보았다. 처음엔 백일을 생각했고 나중엔 일 년을 기약했다. 하지만 일 년 하고도 세 달이 지난 지금 여전히 나는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겁이 나고 두려운 걸 보면 나는 아직 받아들이지 조차 못한 것 같다. 실지로 그렇다. 나는 아직도 아빠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낯설고 그저 잠시 얼굴을 보지 못할 뿐이라는 환상 속에 살고 있으니까. 그랬기 때문에 나는 관련된 책을 보는 것조차 몹시 불편했다. 그렇잖아도 책 편식이 심한 나는 어떤 확실한 목적 때문에 책을 선택한다는 것이 어색한 사람인데 더욱이 그것이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유족들의 마음을 보듬어주기 위한 것이라면 더더욱 싫었다. 왜 그렇게까지 거부감을 가져야 했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였을까.



꾸준히 책을 읽는 가운데 죽음에 관련된 묘사가 나오면 몸이 부르르 떨렸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럴 때면 아직 갈 길이 멀었구나 싶다가 영원히 이러면 어쩌지 불안해졌다.



친한 동생이 책을 보내줬다. '상실과 슬픔을 통해 더 아름답게 서 나가는 언니를 보며 많이 배웁니다'라는 글귀와 함께 내게 도착한 책은 '슬픔을 쓰는 일'이었다. 동생의 마음은 너무나 고마웠지만 얼른 펼쳐 읽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가까이 보이는 곳에 꽂아 두었다. 그리고 어느 날엔 앞 페이지를 열어 보았다. 예상대로 엄마를 잃은 작가가 엄마를 보내드리는 과정을 담은 책이었고 나는 조용히 책을 덮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갔고 지난 주말 양평 가는 짐을 싸며 슬이와 함께 카페를 가게 될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가장 가까이 놓여있던 그 책을 가방에 넣었다. 정말 별생각 없던 행동이지만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그때의 내 작은 선택조차 정해진 수순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예상대로 양평에 도착한 슬이는 숙제할 게 있다며 카페에 가자고 했고 나는 운명에 순응하듯 책을 들고 따라가 그녀가 숙제하는 내내 읽었다.



처음, '내 슬픔을 누군가의 슬픔에 잇댈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내 안에 숨 쉴 공간이 생겨났다는 증거'라는 구절에서 나는 조금 안도했다. 아니 나는 어쩌면 알고 있었다. 숨 막힐 듯 어지러운 순간에서 벗어나 일상을 살고 있는 지금, 숨 쉴 공간이 없지는 않았다. 나는 더한 것을 바라고 있었을 거다. 써야 한다는 생각, 정리하고픈 마음. 결국 그건 내가 덜 힘들고 싶어서 일 거다. 때론 치유이고 성장이라는 그럴듯한 이름 뒤에 숨어있지만. 그리고 뭐가됐든 그 산을 넘어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다시 아픈 순간을 맞닥뜨려야 할 지라도.



때로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큰 동요 없이 책을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많은 부분 공감이 되었지만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그런저런 것을 헤아려가며 읽다니 나도 어느덧 냉정을 되찾아가고 있는 걸까. 내가 힘주어 줄 그은 부분은 슬픔을 회피하는 문화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는 약한 것, 예측할 수 없는 것, 감정과 특히 슬픔을 회피하는 문화에 둘러싸여 있다. 슬픔을 회피하는 문화는 슬퍼하는 사람을 그대로 봐주지 않는다. 그만해라, 언제까지 그 얘기냐. 그만하라는 주위의 압력에 못 이겨 감정은 억압되고 만다. 하지만 가장 정직한 나, 곧이곧대로 보여주는 몸이 말한다. 아직 슬퍼, 나 아직 슬프다니까. 애도 심리에 관한 많은 연구들이 말한다. 애도에 대한 반응은 명백하게 신체적으로 온다고............'



내가 가장 힘들었고 지금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분이다. 내 슬픔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어디서고 떠오르면 펑펑 울고 싶었고 누구에게라도 말하고 싶었다. 내가 지금 어떤 마음인 지, 내가 아빠와 이별한 과정이 어떠했는지, 내가 얼마큼 힘이 드는지. 하지만 아빠를 충혼당에 모시고 돌아서는 그 순간부터 나는 마음대로 울 수 없었다. 집에 모셔온 친정엄마에게 든든한 기둥이 되어야 해서 그랬고, 더는 엄마의 침울한 분위기를 못 견뎌하는 아이들 때문에 그랬고, 나를 이해하려고 애쓰며 장모님에게 최선을 다하는 남편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 주기 위해 그랬다. 나에게는 도무지 제대로 된 애도의 과정을 밟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냥 무턱대고 내 감정 가는 대로 표출했다 한들 내가 조금은 괜찮았을까. 덜 힘들었을까. 그건 단언할 수 없다. 어쩌면 내가 더 잘 알았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는 편이 그 순간 가장 나를 위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어찌 됐든 제대로 된 과정을 밟지 못한, 아니 밟지 않은 나는 몸이 아플 수밖에 없었다.



잦은 몸살과 두통 그리고 여느 때보다 심해진 생리 전 증후군은 서서히 진행되고 있는 노화보다는 마음에서 기인한 증상이 분명 하단 걸 알게 됐다. 모르지 않았지만 제대로 확인받은 느낌이었다. 그러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자꾸 아픈 나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어서.



아직은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지금의 나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준 책이었다. 머지않아 나도 슬픔을 쓰는 일을 하게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즈음이면 몸도 마음도 덜 아프게 되려나.



내 슬픔은 언제쯤 제대로 쓰여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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