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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쁜공감 Nov 19. 2021

 공감과 친구

마흔 넘어 알아가는 친구의 소중함에 대하여

공감받는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나는 자살예방 강의를 할 때마다 아이들에게 꼭 얘기한다. 그런 긍정적인 스토리텔링의 과정은 자존감과 회복탄력성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아이들의 반응이 제각각일 때 나는 덧붙여 말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슴 깊이 공감받은 경험이 없다면 지금부터는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공감을 해주는 사람이 되면 된다고. 그 역시 비슷한 속도로 내 자존감을 키워나가는 일이라고. 사실 내가 더 많이 배운다. 상담을 하면서 나를 돌아보고 점검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면 강의하면서는 내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내 자존감이 바닥을 칠 무렵, 나는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었는데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 시기만큼 누군가에게 공감받지 못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뇌졸중을 겪고 기적적으로 회생한 친정엄마는 내가 투정을 부릴만한 대상이 아니었고, 쉼 없이 일하며 나보다 늦게 결혼하고 그보다 더 늦게 아이를 낳은 언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절친한 친구들은 모두 아이가 없었고, 나는 두 아이를 낳아 키우며 그야말로 고군분투 중이었다. 내 세계는 오로지 집이었다. 남편은 진심으로 나를 위하고 도와주었지만 그건 나와 아이를 사랑해서이지, 내가 느끼는 고립감과 외로움과 공허함을 이해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또래 아이를 키우는 이웃들과 그럭저럭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깊은 교감을 나누거나 정서적인 지지를 얻는 것까지 기대할 수는 없었다.



사실 남편의 적극적인 육아참여 덕분에 어려운 시절을 견뎌냈지만 내 마음 깊은 골을 들여다볼 줄 모르는 그 때문에 외로웠다. 나는 그에게 우선순위였고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이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어야 했다. 내가 가졌던 많은 것들을 던져버린 채로 예상하지 못했고 자신하지도 못하는 일에 매진해야 했던 그 시절의 나는 엄마로서 느끼는 어렴풋한 충만함에 행복하면서도  뼈아픈 결핍 안에서 헤매었다.



십 수년이 지난 지금 굳이 그 시절의 상처를 파헤치고픈 마음은 없고 그저 그 순간 성실했던 남편에게 고맙다. 아마 그 덕에 나는 나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도 어렸다. 나이 서른에 가장이 되어 자기 가정을 충실히 지키고 예쁘게 가꾸고 싶었던 그 마음 만으로도 충분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의 내가 감사를 새기고 평화를 되뇌며 살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공감받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치열한 육아의 시기를 사뿐히 건너온 지금, 젊음은 시들시들 사그라들고 디스크는 두 개나 터지고 어느 순간 점령하기 시작한 흰머리카락은 야속하지만 지나간 일들까지 헤아리며 공감하려 애쓰는 남편과 어느덧 내 키를 뛰어넘어 미처 말하지 않아도 엄마 마음을 읽어주는 딸, 그리고 정말 모든 것을 나누어도 부끄럽지 않은 친구가 있다.



사실 남편이란 존재는 꼭 절절한 공감을 주고받아야 하는 대상은 아니라 생각한다. 너무 다르기 때문에 노력했고 보완이 되었고 진도를 나갈 수 있었다. 무한공감은 부부 사이에 득이 되는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부부는 연애만 하는 사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쏟아지는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고 그것을 공감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래서 애쓰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족하다. 실지로 예전과 비교할 수 없는 센스와 눈치가 탑재된 것만으로도 감동적이다.  딸아이에게는 공감받는 것조차 때로 빚진 기분이 든다. 그게 부모 자식 관계인 것 같다. 그런 공감이 끌어올려진 까닭을 염두하며 내가 무언의 강요를 하진 않았는지, 어떤 장면이 그런 감정을 들게 만들었는지 여러 생각에 복잡해지기도 한다. 아마도 그건 어쩔 수 없는 내 성격 탓이겠지만.



오늘 내가 공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친구 때문이다. 내겐 참 좋은 친구들이 많다. 하나가 아니면 많은 거다. 오늘 만난 친구와 저 깊은 곳까지 공감하며 마음을 나눴는데 그 충만함은 개운함을 넘어선 희열이었다. 모든 걸 쏟아부어도 부끄럽지 않고 돌아서도 후회할 일 없는 친구가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그런 벗이 있다는 건 내가 참 괜찮은 사람이라 여겨지게 하고 살 맛 나게 한다. 가족만큼 중요한 것이 친구임을 마흔 넘어 절절히 깨닫는 중이다.



따뜻한 차 한잔만 사이에 두면 우리는 무한대의 시공간을 함께 오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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