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믐 Dec 07. 2022

미국 음대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샐러드를 팝니다(1)

음악을 사랑했던 순수한 10대 소녀의 마음은 어떻게 다치게 되었을까


미치도록 평범한 집 안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나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에 앞서
우리 집안의 경제력을 얘기하자면 중산층 평범한 집안 그 자체였다. 예술을 한다고 하면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다소 주관적일 수 있지만 대부분은 경제력으로 인해 사회 진출의 출발선이 좌지우지된다.


우리 집은 엄청난 부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못 살진 않았다. 재작년 건강보험공단 지사장으로 정년퇴직을 한 아빠는안정적인 직업으로 1997년 IMF 외환위기도 넘기며 평생 동안 가족들을 안전한 울타리에서 지켜오셨다.


하고집이


어린 시절 나의 눈엔 우리 집이 잘 사는 것 같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조그마한 도시인 통영에서 '비교적' 잘살았던 것이다.

넓은 집에 내 방에는 공주 같은 침대가 있었고 고모에게 물려받은 피아노가 있었다. 그리고 앙증맞은 강아지 한 마리도 키우며 큰 부족함 없이 자랐다. 미술을 배우고 피아노를 배우고 기타도 배우고 바이올린도 배우고 한자 학원도 다니고 수학과 영어 학원도 다니고 감사하게도 하고 싶은 건 부모님께서 다 들어주셨다.

'하고집이'라는 말을 알고 있는가? 얼마 전 쿠팡 플레이에서 화제가 되었던 수지 주연의 '안나' 쿠팡 오리지널을 시청했다면 알 것이다. 하고 싶은 건 다 해야 하는 안 나와 어린 내가 굉장히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렇다고 리플리 증후군을 가지고 있진 않았지만 나는 마음에 내키는 건 무조건 해내고야 말고 경쟁심도 꽤나 강해서 무엇을 하든 항상 우위에 있어야 하는 피곤한 성격의 소유자다.


초등학교 시절, 한 때 꿈은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극 현실주의자인 아빠는 "예술은 안된다"라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고지식하고 윽박질러도 한편으론 마음은 약해서

고집부리면 다 들어주는 아빠다.

멋도 모르는 나는 12살 때 "가난하면 꿈도 가난해야 하나요?"라는 희대의 드립을 날리고

아빠는 얘 말하는 것 좀 보게나 하며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패기 있게 질러놓은 말과는 달리 어깨와 목 통증으로 바이올린을 관두면서 거창한 음악가의 꿈이 일단락된 듯싶었다.

13살의 어느 날, 초등학교 1학년에 시작해서 4년 간 배웠던 피아노 욕심이 솟구쳤다.

초등학교 합창부에 속해 있던 나는 피아노 자리가 탐이 났나 보다.
합창 단원은 여러 명이지만 피아노는 단 한 명의 반주자가 필요하니 돋보이는
단 한 명이 나이고 싶었다. 조용한 관종이었다.

그때부터 독학으로 다시 피아노를 시작하며 웬만한 유명한 곡들의 악보를 모조리 프린터 해서
몽땅 완곡했다. 합창부 셋 리스트 반주도 완곡했다.
이 재능은 중학교에 진학한 후 발휘된다.


음악은 나의 길? 아니길.

중학교에서는 매년 교내 합창대회가 개최되었는데,

나는 3년 내내 반주자로 지원하여 자리매김을 했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는 통기타에 빠졌다.

2009년 당시 TV에는 여자 신인 가수 '아이유'가

데뷔하여 대중가요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연약한 손가락으로 통기타의 날카로운 스트링을 잡고

곱디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녀에게 홀딱 반했다.

그 뒤론 "나도 기타 칠래!"라고 선언하며 당장 기타 학원을 등록했다.

처음 갔던 기타 학원에는 젊은 형제 두 명이 운영을 했는데 그중 동생은 웬걸, 상 변태였다.

어느 날은 개인 연습실에 들어와서 살짝 찢어진 내 청바지 사이로 보이는 무릎에 손을 대는 것이 아닌가.
개인적인 문자를 보내기도 했는데 그 뒤로 학원을 관두고는 독학을 했다.

Daum 핑거스타일 기타 카페에 가입해서 강의 영상과 함께 악보 자료를 프린트하여 한곡씩 완곡하며 점차 실력을 늘려 나가니 어느새 내 방엔 악보 파일들이 두껍게 쌓여있었다.

핑거스타일 기타로 유명한 코타로 오시오의 황혼, Fight, Windsong 그리고 Andy Mckee의 곡들 외에도 참 부지런하게 찾아서 연습했다.


그래도 공부는 놓지 않았는데 딱히 타고난 공부 머리는 없었다.

중위권에서 맴돌던 나는 내 방에 있는 피아노가 나를 계속 유혹해서 공부에 방해가 되니

유리 테이프로 피아노 덮개를 꽁꽁 감아 시험이 끝날 때까지 열 수 없도록 봉인해놓았다.

엄마, 아빠도 내가 하는 행동들이 기가 차는지 누구 닮아서 이렇게 별나냐며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나는 반에서 6등을 했다. 그리고 전교생이 320명 정도

되었는데 그중에서 84등을 했다.
나쁘지 않은 결과였는데 사실 나의 학창 시절 공부는 여기가 끝이다.


눈물의 떡 회담

중학교 3학년,
엄마와 나는 부엌의 식탁에 마주 앉아 종종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어느 날은 떡을 한 접시 올려놓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나는 떡 하나를 입에 물고 우물우물 씹다가 대뜸 음악이 간절하게 하고 싶다고
엄마 앞에서 눈물 콧물 쇼를 하며 대성통곡을 했다.

콧물이 범벅이 되어 엎드려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갑자기 뭐가 그리 서러웠는지 잘 모르겠다.


엄마는 아빠와 정반대로 아주 이상적이다.

(아빠 ESTP 엄마 INFJ)

어릴 때 엄마가 못 누렸던 것을 다 해주려고 했다.
악기를 연주하는 딸이 대견하고 예뻐 보였나 보다.
성인이 되어 엄마를 보니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우리 엄마는 철부지 공주다.
그때 엄마가 날 말렸으면 지금은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수차례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말려질 나도 아니겠지만)

아무튼 그날을 계기로 나는 영어, 수학학원을 그만두고 엄마 손을 잡고 며칠 동안 음악 학원을 찾아다녔다. 기타와 피아노를 다 배울 수 있는 곳이 없을까 해서 발견한 촌구석의 동네 학원 이름이

'버클리 실용음악 학원'인 것이다.


그로부터 6년 후,
나는 미국 보스턴에 위치한 Berklee College of Music에 $20,000의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다.



작가의 이전글 [넷플릭스 다큐] 미니멀리즘 | 오늘도 비우는 사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