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잃은 할머니가 여장부로 살아온 방법
세려나, 우짜든지 완벽할라꼬 하지마라. 그라모 니가 너무 데다.
*데다는 '힘들다', '지친다'라는 뜻의 경상도 방언입니다.
나의 이름은 세린. 올해 중순 개명한 이름을 할머니에게 알려주니 아무리 연습해도 혀가 안 돌아간다며
할머니는 결국 세련이라고 부른다. 세련이 더 예쁜 것 같은데 김세련이라고 지을걸 그랬나?
얼마 전 아침밥을 챙겨 먹고 있는 내 옆에서 할머니는 구부러진 허리에 뒷짐을 진 채 아침 인사를 건넸다.
"세려나 내 고마 아침으로 미숫가루 하나 타 물란다 물 좀 끼리바라."라고 하기에 나는 전기포트에 물을 받아 얹어놓고 주방을 서성거리다 얼마 남지 않아서 바닥에 질척하게 들러붙어있는 꿀단지 하나를 발견했다.
"할무니 여기 꿀단지에다 미숫가루 타 먹으면 되겠다."
할머니는 "내 그 생각을 몬했네. 아이고 우찌 그른 생각을 다했노."
라고 말하자마자 침묵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세려나, 우짜든지 완벽할라꼬 하지마라. 그라모 니가 너무 데다. 니가 너무 데서 안돼.."
1942년생인 외할머니는 아직도 경제 활동을 한다. 긴 세월에 구부러진 허리는 할머니의 고된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엄마는 할머니의 훈장이라고 말한다. 할머니의 건강이 매년 눈에 띄게 안 좋아지는 것이 느껴질 때마다 이제는 그만 쉬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그래도 평생 하던 일을 갑자기 관두고 온종일 집에서 시간을 때우기엔 할머니 마음이 더 고달파지지 않을까 싶어서 가족들도 쉽게 만류하지는 못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할머니는 선캡을 쓰고 파란색 구루마(수레)를 지지대 삼아 거북시장으로 출근을 한다.
결혼한 지 2년 만에 두 자식을 얻었지만 남편을 여의게 된 할머니
나는 외할아버지를 한 번도 뵌 적이 없다. 엄마도 엄마의 아빠를 본 적이 없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동갑내기 25살에 동네 어르신들로부터 중매를 받아 결혼을 하셨다고 한다. 슬하 1남 1녀를 두었지만, 결혼한 지 2년 만에 그리고 엄마가 태어난 지 2개월도 채 안되었을 때, 외할아버지는 갑작스럽게 앓아누워 그대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남편을 잃은 슬픔에 잠길 새도 없이 할머니는 갓난아기와 어린 아들을 홀로 키워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게 된 것이다. 황량하게 무너지는 마음을 어떻게 버텨냈을지 나로서는 도무지 슬픔을 가늠할 수가 없다.
토끼 같은 두 자식을 고아원에 보낼까 하는 고민도 했었다는 할머니는 선뜻 그러지 못했다. 어떻게든 키워내야지 어떻게 해서든 내 자식 내 옆에 두어야지 하고 악착같이 살아간 할머니는 동네 쌀집에서 머리 위로 대야를 이고 가게나 집에 쌀 배달을 하러 다녔다고 한다. 어린 엄마는 쌀 배달하는 할머니 옆을 졸졸 따라다니며 내내 할머니 곁을 지켰다고 한다. 홀로 어머니와 아버지의 자리를 모두 지켜내던 할머니는 84년도에 직접 쌀가게를 차리게 된다.
외할머니의 시민 양곡 상회
할머니는 매달 1, 6일 돌림으로 통영 옆의 고성 시장으로 물건을 떼러 간다. '1일, 6일, 11일, 16일, 21일・・・' 할머니는 고성에서 사들여온 흰 쌀, 찹쌀, 현미쌀을 비롯해 갖가지 곡물을 형형색색의 다라이(대야)에 붓고 팻말을 꽂는다. 그리고 직접 짜 온 참기름, 빻아온 고춧가루, 식혜 만들 때 쓰이는 질금, 고소하게 볶은 통깨들을 저울에 용량을 달아 참기름은 소주 공병에, 나머지들은 투명한 비닐에 담아 공기를 빼고 반듯하게 거북시장 할머니의 자리 판데기 위에 올려놓는다.
어릴 때 등하교를 하면 늘 거북시장을 가로질러 다녔다. 항상 같은 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할머니를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나 또한 올해 자영업을 시작해보니 같은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 일엔 크나큰 책임과 고독이 따르고 자신과의 싸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코가 얼어붙는 시린 겨울을, 등골에 서늘하게 흐르는 땀 한줄기에 무더운 여름을, 눈앞에서 무심한 듯 흘러버리는 시간을, 지고 피는 꽃과 잎들에서 한 세월을. 자영업을 하다 보니 속절없이 변해가는 계절을 저항 없이 바라보며 나만 두고 모두가 변하는 것 같은 무기력에 빠지는 날이 많았다.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할머니는 덜먹고, 덜 쓰고 자식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오셨다. 뿐만 아니라 다섯이 되는 손녀 손자들 대학 등록금까지 모두 책임지며 오로지 주는 삶을 살아온 할머니는 나와 오빠가 성인이 되어서 서울에서 통영 본가로 내려올 때나 명절 때도 용돈을 10만 원씩 20만 원씩 챙겨주시곤 했는데 한 번은 정말 단순하게 궁금해서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무니는 맨날 돈 없다면서 계속 돈이 어디서 나와?"
할머니는 무슨 그런 질문이 있냐는 듯 멀뚱히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내가 모았다."
할머니에게 빚진 게 한 두 푼이 아니다. 비싼 물가와 학비를 감당해내야 하는 미국 대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던 것도 할머니의 공이 컸다. 물론 아빠의 도움도 크지만 할머니는 지긋한 연세가 되어도 자식들에게 손을 벌리려 하는 법이 없다. 주면 줬지 받지는 않는 게 할머니의 원칙이다. 이번 어버이날에 20만원을 봉투에 넣어 드렸는데 10만원만 받고 10만원은 도로 돌려주었다.
나는 할머니와 부모님의 큰 도움으로 미국에서 값비싼 공부를 마치고 쉽게 경험할 수 없는 해외생활을 하고 왔는데 그 재능을 살리지 못한 채 아직도 부모님 등에 업혀있는 아이 마냥 할머니와 부모님의 땀과 노력이 담긴 노고에 제대로 보답하지 못하는 것 같아 죄책감을 많이 느낀다. 나는 왜 아직도 1인분 몫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걸까?
'나도 나중에 외할머니 같은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할머니를 따라 고성 장으로
1일, 6일 돌림으로 통영에서 고성으로 장을 가는 할머니는 새벽 5시에 알람을 듣고 일어나 가족들의 잠을 깨우지 않게 최대한 조용히 챙겨나가신다. 시내버스를 타고 통영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면 고성으로 가는 표 한 장을 끊어 구깃구깃하게 접어 가져온 신문지를 발 밑에 펼친다. 퉁퉁 불어 본래대로 돌아올 생각이 없는 두 발을 신발에서 꺼내 신문지 위에 얹고 30분가량을 달린다. 할머니가 시민 양곡 상회를 차리고 나서 평생 동안 쉬지 않고 해온 일이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는 할머니가 거동이 어려워지자 엄마, 아빠, 외삼촌이 번갈아 할머니를 차에 태우고 함께 고성에 장을 보러 간다. 작년 가을, 나는 서울 있다가 잠시 통영 본가로 쉬러 내려와서 새벽 5시에 일어나 아빠와 함께 처음으로 할머니의 고성 장에 따라갔다. 조그만 고성 시장 안에서 나는 한 시간 가량 구루마를 끌고 다니는 할머니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난생처음 할머니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외로이 홀로 다니던 길을 손녀와 함께 다니니 할머니는 그날 부쩍 힘이 더 나셨던 듯하다.
고성의 시간은 통영보다도 더 느리게 가는듯했다. 낡은 가게들이 줄줄이. 휑한 골목 사이사이로 달갑지 않은 바람이 불었지만 여전히 인심만은 따뜻한 곳들. 처음 보는 참기름 짜는 기계, 고추 빻는 기계들은 작동이 될까 싶을 정도로 낡았지만 그 기계는 땟자국이 끼어도 왠지 더 구수할 것 같은 깊은 세월의 맛이 느껴졌다.
깨를 넣고 참기름을 짜내면 방앗간 안에 온통 꼬순내가 진동을 한다. 당장 흰밥에 묵은 김치와 김가루를 뿌려 비벼 먹고 싶은 그 고소한 냄새가 코 안을 누빈다. 압축되어 동그란 형태로 눌려진 깻묵은 할머니의 지인이 농사 비료로 쓰신다기에 쌀자루에 담아서 들고 갔다.
할머니의 비율로 제조한 미숫가루는 고 고 고단백질이다. 서리태, 보리, 율무, 현미, 깨, 맵쌀 등 할머니가 방앗간에서 곱게 분쇄해온 미숫가루를 우유와 꿀에 타서 먹으면 구수하고 묵직한 것이 일반적인 마트에서 파는 미숫가루와는 차원이 다르다. 할머니의 미숫가루에 남다른 자부심이 있는 나는 때때로 나이가 조금 있으신 지인분들께 감사의 의미로 선물을 하기도 했다.
참기름을 다 짤 때까지 할머니는 또 다른 상회로 가서 거래를 한다. 할머니는 구루마를 가게 밖에 세워놓고 거침없이 들어간다. 정신없이 물건이 널려있는 가게 안 할머니는 낮은 플라스틱 의자를 찾아내 힘겹게 엉덩이를 붙이고선 겹겹이 비닐봉지에 싸인 할머니의 쪼매이(가방)에서 지역상품권을 꺼낸다.
오며 가며 만나는 상인분들과 나누는 대화는 늘 똑같았다.
"아이고 장사라꼰 안된다.."
"그렇지예, 마자예.."
쌀장사로 건물 하나를 살 수 있을 정도로 거래가 왕성했던 과거의 재래시장 비하면 현재는 온라인에서 많은 거래가 이루어지다 보니 재래시장의 1차원적인 판매 구조는 온라인 거래로 새로운 방법을 도모하지 않는 이상 이전만큼의 전성기를 되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렇게 한 시대가 저문다.
그래도 저마다 밭에서 곱게 키워온 애호박이며 고구마 줄기며 새파란 고추며 팔려고 바리바리 싸들고 나온 시장의 할머니들은 샛노란 개나리처럼 아리땁게 무리 지어 앉아있다. 팔면 팔고 못 팔면 못 팔고 익숙한 일상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그저 하하호호 정겨운 사투리로 입담을 나누며 웃음꽃이 피는 노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리고 휘황찬란한 구루마 스킬로 고성 시장 골목을 속속 누비고 다니는 우리 외할머니도 이 일을 활력으로 살아가는 듯했다.
그 할미에 그 손녀
외할머니는 유쾌한 성격은 아니다. 강인해 보이지만 어찌나 속이 여린지 별 것도 아닌 일에 애달픈 마음으로 종종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 쉬는 것도 잘 못하는 할머니는 허투루 보내는 시간도 없고 고집불통에 눈치는 빠르고 남에게 쓴소리 안 듣도록 피해 안 끼치도록 고군분투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속에 담아두는 것들이 많아 화병이 많은 할머니를 나는 쏙 빼닮았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그런 할머니는 엄마와 아빠보다도 내 마음을 잘 헤아려준다. 내가 남 모르게 힘들게 보낸 시간들을 할머니는 말하지 않아도 먼저 알아차린다. 고군분투하며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2019년 가을, 할머니는 내 가방에서 수면 유도제 약을 발견하고 얘기했다.
"니 그기서 많이 울었제?"
이 글의 첫머리에서 했던 너무 완벽하지 말라는 말도 그렇고 할머니는 한 번씩 내 말문을 턱 막히게 한다.
어떻게 나를 그렇게 잘 아는 걸까? 나와 할머니는 많이 닮았기 때문일까?
어릴 적부터 할머니와 함께 한 방을 쓰면서 지지리도 많이 싸웠다. 지지고 볶을 때마다 할머니는 "니도 나이 들어봐라!"라고 되받아쳤는데 사실 요즘도 종종 듣고 있다. 진절머리 나게 싸우다가도 금세 풀려 어떤 날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아 할머니는 옛날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모든 게 닮아서일까 할머니는 내가 겪는 상황들을 미리 다 겪어본 듯 내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는 것 같다. 다치지 말라고, 힘들지 말라고..
82세를 바라보는 할머니는 허리는 더 굽고 눈물은 더 많아지고 귀는 어두워지지만 궁금한 것은 너무 많다.
할머니는 종종 엄마에게 별 것 아닌 것들로 고집을 부릴 때가 있는데 나이는 들어가고 외로움과 서글픔에 고까운 마음이 들어 자식을 향한 애정 표현을 서툴게 하는 듯했다. 한평생 우리 집에 쌀 한 톨 떨어지게 하는 날 없게 살림을 책임졌던 할머니는 오늘도 시장으로 나보다 먼저 출근을 했다. 언젠가 언젠가 할머니가 직접 짜 온 참기름이나 볶아온 통깨나 할머니의 비율로 만들어온 미숫가루나 대가 없이 먹던 곡식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될 날도 올 텐데 그날이 오면 얼마나 가슴이 먹먹할지 상상도 하기 싫다.
아직도 새 옷은 죽어도 안 입고 아빠가 입던 헌 옷만 가져다 입는 할머니.
삶에서 기쁨보다 슬픔을 더 많이 느끼는 할머니. 같이 산책 가자 해도 안 갈 거라고 절대 고집 안 꺾는 할머니....... 새해부터는 무거웠던 짐 내려놓고 하루하루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 보고 살아오며 느꼈던 애환에서 벗어나 기쁨을 더 많이 느끼고 조금은 자신을 위해 사셨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람이다.
퇴근하면 늘 우리 새끼 왔냐며 어야 둥둥 반겨주는 할머니 품에 안기면 참기름 꼬순내가 진하게 난다.
강인하게 버텨온 할머니의 퉁퉁한 손으로 엉덩이를 툭툭 두들겨주면 오늘 하루도 무사히 끝났다는 안도감이 든다. 그렇게 나는 또 할머니를 본보기 삼아 부지런히 출근을 한다.
그 할미에 그 손녀이니 나도 할머니처럼 그 어떠한 시련에도 굳건히 맞서 싸우며 버텨낼 수 있을거라 믿는다.
나도 우리 할머니처럼 멋진 할머니가 되어야지.
많이 줄 수 있는 삶을 살아야지..
‘브런치 에디터 pick’ 선정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