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쏟아봐

수납상자도 물건이다

by 아이스블루



수납상자를 참 좋아한다.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키가 맞고 통일감 있는 수납상자에 넣으면

대충 집어넣어도 가지런히 정돈해 놓은 것 같고 꺼내기가 쉽기 때문이다.

칼같이 정리를 안 해놔도 신경 써서 수납한 듯 보이도록 마법 같은

눈가림을 해주는 것 같다.


그래서 집안 정리가 필요할 때는 언제나 수납상자를 먼저 검색하게 된다.

정확한 사이즈의 상자를 고르기 위해서 줄자는 꼭 필요한 준비물이고,

이제 실측하는 일에도 도가 텄다.

10cm 정도의 틈새 공간만 생겨도 꼭 들어맞을만한 박스가 없는지 찾아보고

뭐든 욱여넣을 궁리만 했으니,

내가 살림살이로 테트리스 놀이를 즐기게 된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찾기만 한다면야 사이즈나 디자인에서도 취향에 맞는 갖가지 수납상자가

쇼핑몰에는 넘쳐나고 클릭 한 번만으로

내 공간에 맞는 예쁜 바구니들이 줄지어 도착한다.




바구니 하나에도
왜 그렇게
가슴이 설레는 거냐구…




출처- unsplash





수납상자, 바구니마다 물건 정리를 빈틈없이 잘해 놓고

박스에 네임텍까지 붙여놓으면 찾기 쉽고 꺼내는대도 문제가 없다??

괜찮은 것 같은데 문제가 있었던 건 나만 몰랐나 보다.

물건 담기 놀이를 하다 보니 더 이상 들어갈 곳이 없음을 느끼고

또다시 새로운 수납상자를 찾는다.

"저기요!! 잠. 깐. 만. 요~~

바구니가 하나 더 생기면 해결되나요?

정말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나요?"


많아요

물건이 너무 많아요

집에 물건이 너무 많아요


물건 담을 공간이 부족하다고 느낄 땐

수납장이나 수납박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전에

집에 비해서 물건이 지나치게 많은 것은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한다.


이쯤에서 나는 큰 결심을 하게 됐다.

내가 줄자로 재고 그 공간에 어울리는지 수없이 시뮬레이션해 보며

고르고 고른 예쁜 바구니들을 들어내본다.

안에 있던 물건을 모두 바닥에 쏟고 수납박스는 일단 옆에 쌓아놓았다.

끝도 없이 나온다. 박스가...

우선 놔둘 것과 내보낼 물건을 분류한다.

필요한 건 원래대로 수납하고 안 쓰는 것은 버리거나 기부한다.


놔둘까? 버릴까?

아직 결정하지 못한 물건들은 자리를 정하지 않고 그냥 거실 바닥에 두었다.

집안 한가운데 몇 시간이건 며칠 동안이건 물건을 치우지 않고

방치해 둔다는 것은 정말 참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 힘듦이 약이 되어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정리가 되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하게 됐다.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잡동사니가 곱게 보일 리 없었으니

어떻게든 골라내고 가족과 합의(?)하여 바닥에서 치워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수납박스 안에 정리되어 있는 물건은 모두 필요하고

우리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리 과정에서

수납장 2개, 책장 2개, 서랍장 3개, 각종 수납박스만 대략 30개 분량을 비워냈다.

비우는 과정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없애버려서 아쉽거나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빼곡히 들어차있던 수납장과 수납박스가 빠져나가고

남은 빈 공간을 보면서 느낀 후련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수납박스가 집안정리를 해결하는 요정, 지니가 돼줄 거라고 생각하지 말자.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것은 수납장조차 필요 없는 빈 공간일지도 모른다.

정리를 위한 손쉬운 도구이지만 수납박스도 엄연한 '물건'이다.

앞으로는 작은 바구니하나라도 신중하게 들여놓자고 다짐하게 된다.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