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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았고 살아갈 것이기에 소중하다

에필로그

by 아이스블루



소설 <빨강머리 앤>이 원작인 동명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마릴라 아주머니는 항상

같은 옷을 입고 나온다.

예전 애니메이션 등장인물들의 복장은 대체로 모두 단벌이지만, 특히 마릴라 아주머니는

검소한 생활을 강조했고,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입버릇처럼 앤에게 하는 말은 교회 갈 때 입을 옷 한 벌과 학교 갈 때 입을 옷 두 벌이면

더 이상의 옷이 필요 없다고 했다.

하지만 앤은 다른 아이들의 화려한 퍼프소매의 드레스가 한없이 부러웠고, 자신의 장식도 없는

소박한 옷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그래도 멋 내기를 포기할 수 없었는지 평범한 모자에 꽃장식을 하느라 수업에 지각해서

벌을 서고, 마릴라 아주머니의 브로치를 허락 없이 달았다가 외출금지를 당하는 등 웃지 못할

해프닝도 생기게 된다.

이 모두가 앤이 외모를 가꾸려다 벌어진 일들이었으니, 한창 예쁜 걸 좋아할 나이의 소녀가

마음껏 멋을 부리기에는 너무 고지식하고 조용한 마을이었나 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빨강머리 앤> 속의 등장인물 들이야말로 생존아이템으로 최소한의 의복을

착용하며 진정한 미니멀라이프를 실천했던 사람들이었던 같다.

하지만 매일 같은 옷만 입고 나온다고 촌스럽다거나 지겨운 느낌이 들었던가?

아주머니가 만들어준 앤의 단정한 무채색 옷 3벌은 정말 정갈하고 고급스러워 보였고,

보고 있으면 마냥 마음이 편안해지던 애니메이션이었다.

그래도 마을에서 특별한 행사라도 열리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옷과 모자로

격식을 차린 걸 보면 이들은 정말로 멋을 부릴 줄 아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이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실사 드라마였다면? 현실 상황이라면?

매일 같은 옷을 입고 등장해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적어도 1~2회에 한 번꼴로, 아니 한 회에도 여러 번 옷을 갈아입고 나올 것이다.

왜 그렇게 옷을 여러 벌 가지고 입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들의 옷장은 항상 가득 차있다.



drawing by 아이스블루





요즘같이 풍요로운 시대에 ‘갖고 싶지만 ‘ 못 사는 게 아니면 솔직히 ‘필요한데도’ 못 사는 물건이

그렇게 많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당장 없어서 곤란한 패션 아이템은 없다.

만약 지금 재킷을 하나 산다면 지름신이 내려서 안 사도 되는 걸 또 사는 과소비에 속하는

물건이 될 것이다.

패션에 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직접 입어보고 사야 실패가 없다>는 사실 하나밖에 없는

패션무식자가 처음 패션 아이템에 관한 설을 풀기로 했을 때 솔직히 조금 망설였다.

나에게 전혀 어울리는 얘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옷 잘 입는 방법에 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선택한 것들에 관한 얘기라면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남들보다 적게 가지고 있는 옷과 가방들, 그래서 내게 더 특별해진

물건얘기를 한번 해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예쁜 물건을 좋아하면서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한다거나, 패션감각도 없고 옷도 못 입는 사람이

패션 아이템에 관한 글을 써서 올릴 때 다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특별한 얘기가 뭐 있겠어? 라던지,

“타고난 성향과 추구하는 바가 다르시군요~”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이제는 뭔가를 열심히 검색하고 새로 사지 않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로 지낼 수 있으니

편안한 마음까지 든다.

필요한 상황에 맞는 적당한 아이템을 골고루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생존아이템>을 글로 정리하면서 의외로 얻게 된 수확이라면, 가지고 있는 것들에게

한층 더 애정이 생겼고 더욱 소중하게 아끼며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1년 365일 쓰고 있는 물건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니 스스로 미니멀 리스트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었고, 내 취향이나 성격을 그대로 나타내는 그것들은

나를 닮아 있었다.


뭔가 끊임없이 필요하다는 결핍을 느끼지 않아야 쇼핑하고 싶은 마음을 접고, 더 중요한 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

또한 지금 필요한 것이 통 크게 투자할 가치가 있는지, 저렴한 것으로 구입해도 잘 쓸 수 있을지

먼저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깊이 생각하고 신중하게 결정해서 구입하게 된 물건들은 오래도록 후회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이렇듯 옷하나 사는 일에도 많은 생각이 필요하고, 한번 사면 웬만해선 끝까지 사용할 각오로

들여놓기 때문에 구매결정하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우리 같은 사람은 옷을 하나 살 때에도 에너지가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도록 힘이 들지만

그렇다고 쉽게 타협할 수는 없다.

패션 아이템은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모습으로 나를 드러내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도 아니고, 당연한 말이지만

본연의 모습이 가장 자연스럽고 예쁘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아이템에 관한 이야기는 봄이면 꺼내 두르는 "파시미나"로 시작해서

한겨울을 따뜻하게 책임져줄 "가디건"으로 끝이 났다.

그러고 나면 다시 "가디건"으로 시작해서 봄의 "파시미나"와 한여름의 "양산"을 다시 쓰게

되는 무한반복의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계절이 바뀌면 새 옷 쇼핑할 생각에 마음이 설레기보다 아끼던 내 물건을 다시 꺼낼 생각에

뿌듯해 할 수 있길 바란다. 마치 <빨강머리 앤> 속의 마릴라 아주머니가 앤을 위해 정성껏

만들어서 개어놓은 몇 벌의 정갈한 옷을 보는 느낌과도 같이 말이다.


그래도 지겹지 않은 것은 언제나 익숙한 내 물건이기에,

나와 함께 살아갈 물건들이기에 더 소중하다.

drawing by 아이스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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