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살, 퇴사하고 대만 한 바퀴
예스허지 투어를 마치고, 새로 옮긴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언젠가는 그동안 묵었던 숙소에 대한 후기를 남길 생각이지만, 이번 숙소는 정말 위치 하나만큼은 끝내주게 좋은 숙소였다.
오늘은 지난주에 화롄을 여행하던 중, 충동적으로 예약했던 양명산과 북부 소도시 투어를 떠나는 날.
새벽에 비가 오더니, 아침에는 그친 듯 보였다. 정말 다행이다.
이번 투어는 메인역 서3입구에서 집결이라 서둘러 숙소 바로 앞에 있는 타이베이 메인역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패밀리마트에 들러 정체를 알 수 없는 만쥬 같은 것을 사 먹었다.
대만 여행을 하며 정말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바로 편의점이다.
한국에서는 집 근처에 재래시장과 대형마트가 워낙 잘 되어 있어서 편의점 갈 일이 별로 없었는데,
대만에서는 편의점 없는 삶이 상상도 되지 않을 만큼 자주 들르게 된다.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서면 느껴지는 차예단의 달콤 짭조름한 향기,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편의점 즉석식품 코너를 슥-보다가, 맛있어 보여서 고른 만쥬는 예상외로 무케이크(萝卜糕) 느낌이 더 강했다. 겉은 패스츄리 같은 식감인데, 속은 촉촉...
조금 느끼했지만, 그래도 아침을 안 먹을 순 없으니 두 개를 깨끗하게 먹어치웠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약속한 시간이 되었고,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투어 회사 깃발을 든 사람이 보였다. 오늘의 가이드였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는 동안, 가이드는 내 이름을 여러 번 확인하더니,
“너 한국인이니? 내가 하는 말의 발음이나 속도는 괜찮니? 알아들을 수 있니?”라며 굉장히 섬세하게 신경 써주었다. 그리고는 내가 입은 원피스를 보며, “오늘 많이 추울 것 같은데…”라며 걱정까지 해주었다.
또 한 번 느끼는 대만 사람들의 다정함...
이번 양명산 투어의 목표는
양명산에 있는 쭈즈호에서 만개한 카라꽃을 배경으로 인생샷을 찍는 것이었기에,
아껴두었던 원피스를 꺼내 입고 나왔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냥 평소처럼 입을 걸...
큰 승합차에 두 팀으로 나눠 탑승했다.
우리 차량에는 한국인인 나, 싱가포르에서 온 젊은 커플, 홍콩에서 온 할머니 두 분이 함께 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묘한 정적이 흐르자, 운전 겸 가이드를 맡은 대만 아저씨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에서는 잔잔한 대만 음악이 흘러나왔고, 나는 음악을 듣다가 잠시 까무룩-하고 잠들었다.
얼마쯤 잤을까. 거의 도착한 기분이 들어 천천히 눈을 떴는데...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양명산에 도착하자마자 갑작스럽게 비가 내리며, 산 전체가 짙은 안개에 끼어버린 것이었다.
아, 한 치 앞도 구분할 수 없는 이 풍경은 마치 내 인생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가이드 아저씨는 아주 조심스럽게
“여기서 투어를 진행하는 건 어려울 것 같으니, 다음 장소로 이동할까요?”라고 제안했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양명산 트래킹을 꽤 기대했는데,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다.
아쉬웠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렇게 비가 자주 오는 나라를 여행하면서
오늘처럼 흐리고, 여행에 지장이 있을 정도였던 날은 거의 없었다. 어쩌면 오늘이 처음일지도?
여행 내내 화창하고 쾌청한 날씨였으니, 이쯤 되면 나도 날씨요정 아닌가?
그동안 계속 날씨운이 좋았던 것을 생각하니, 한 번쯤 이런 날씨도 경험할 만하다고 위로해 본다.
그렇게 생각하니, 양명산 트래킹을 못해서 속상했던 마음도 한결 누그러졌다.
무엇이든, 마음먹기 나름이다.
우리는 양명산 꽃시계에 도착했다.
산 위쪽에는 그렇게 비가 많이 내렸는데, 산 아래로 내려오니 거짓말처럼 비가 그쳐 있었다.
가이드는 원래 계획에 있던 트래킹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곳에서 시간을 넉넉히 줄 테니 편하게 관람하고 오라고 했다.
비는 멈췄지만, 제법 바람이 불어서 날씨는 여전히 쌀쌀했다.
그래도 공원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기로 했다.
길을 걷다 보니, 일본풍의 캐릭터들이 눈에 띄었다.
여행하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한국과 대만 모두 '일제의 식민지배'라는 아픈 역사를 겪었지만, 그 이후의 인식은 꽤 다르다는 점이다.
한국인은 일본을 ‘가위, 바위, 보도 지면 안 되는’ 경쟁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대만은 일본 문화를 좋아하고, 편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꽤 많았다. 물론 반일 감정을 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이 부분이 개인적으로는 매우 신기하게 느껴졌다.
같은 식민 지배를 겪었는데, 이렇게 다르다니.
글을 쓰고 있는 현재, 타이완의 역사에 대한 책을 읽고 있다.
아직 공부가 짧아서 대만의 역사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하긴 어렵지만, 정말 흥미롭다.
앞으로도 계속 대만의 역사를 공부해보고 싶다❤️
비록 흐린 날씨였지만, 내가 좋아하는 등나무꽃부터 벚꽃, 매화까지 모두 볼 수 있어 좋았다.
처음에는 가볍게 산책만 할 생각이었는데, 걷다 보니 어느새 본격적으로 꽃시계 공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꽃시계 공원을 산책하다 보니
꽃을 좋아하는 우리 엄마도 무척 좋아할 것 같은 장소라,
곧바로 전화를 걸어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다.
“여기 왠지 엄마 스타일이에요! 예쁜 꽃이 많이 폈어요.”
“나나야, 예쁜 거 있으면 뿌리 캐 와!”
“아니! 그럼 나 잡혀간다고!!”
엄마표 개그는 언제나 아찔하다.(웃음)
날씨는 흐렸지만, 그래서인지 관광객도 거의 없어서 아주 한적했다.
오히려 사색하며 산책하기에는 더 좋았다.
커다란 꽃시계를 마지막으로 구경한 후,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약속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 있어서 아까부터 눈여겨본 매점으로 달려갔다.
핫도그를 사 먹으려 했는데, 가게는 열려 있었지만 사장님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찰나, 옆 노점에서 고구마를 팔던 아주머니가 다가오시더니, “뭘 드릴까요?”라고 하셨고, 나는 바로 핫도그를 주문했다.
가게 주인도 아닌데... 너무 쿨하신 거 아닌가?
핫도그를 건네받고 케첩을 듬뿍 뿌린 뒤 한 입 먹었는데...
속이 안 익었어...!!
역시 옆집 아주머니는 핫도그 전문가가 아니셨다.
그래도 시장이 반찬이라 그런지 맛있게 먹었다.
다소 기름에 절어 있는 핫도그 느낌이었지만, 그것조차 좋았다.
아, 이 핫도그가 오늘 내 유일한 점심 식사가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알았으면 고구마도 하나 더 사 먹을 걸...
핫도그를 하나 먹고 차 앞에서 얼쩡거리자, 가이드 아저씨가 오셔서 차 문을 열어주셨다.
배도 부르고 등도 따뜻하니, 다시금 잠이 솔솔 쏟아졌다.
우리 차는 이제, 주즈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