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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도피] 8. 타이중 산책하기①

36살, 퇴사하고 대만 한 바퀴

by 나나


무계획으로 시작한 아침


나의 찬란한 도피는 오늘도 현재 진행형이다.


여행 3일 차.


오늘은 무지개마을, 궁원안과, 고미습지 반나절 투어를 예약해 두었기에 오전에는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어제 일월담과 칭징농장을 여행하면서 들렀던 일복당에서 사 온 레몬케이크와 커피 한잔으로 간단히 아침을 하고 밖으로 나섰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늘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던 내가 이번 타이중 여행만큼은 놀랄 만큼 무계획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파워 J였던 나는 여행 때마다 분 단위로 일정을 짜고, 제3안까지 준비하던 사람인데...

나에게도 이렇게 즉흥적이고, 여유로운 면모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혹시 그동안 남들의 평판 - "너는 예민해.", "너는 J니까 계획을 좋아해" 등에 갇혀 나를 규정해 온 건 아니었을까? 너는 예민하고, 까칠하고, 감정표현을 잘하고, 감정이 극단적으로 변하는 편..이라는 남들의 이야기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정말 그렇게 변해왔던 것은 아닐까?


내 속에도 유연함도 여유로움도 존재하고 있었음을 이 여행에서야 느끼게 되었다.




타이중 공원 산책


숙소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타이중 공원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타이중 도심을 아주 크게 산책하기로 했다.

발이 아프면 쉬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는...

계산이나 강박을 내려놓은, 본능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보기로 했다.




타이중 공원으로 향하는 길에 잠시 약국에 들렀다.

여행 출발 전부터 몸상태가 좋지 않았고, 기침 후유증으로 코막힘과 콧물이 심했다.

약사에게 중국어로 말을 걸자, 그는 영어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영알못인 나는 당황스러웠다.


“저기, 중국어 알아들어요. 중국어로 말해주세요.”

“abcdef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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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중에서 간 약국


외국인 고객이 많이 방문하는 약국인지, 약사는 친절하게 영어로 된 설명서까지 보여주었지만,

나는 중국어로 끝까지 대답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면서도 대화가 되는 이 상황이 웃기면서 묘하게 뿌듯했다. 결국 무사히 약을 사고 공원으로 향했다.



IMG_8612.JPG?type=w773 아름다운 타이중 공원
IMG_8615.JPG?type=w773 아름다운 타이중 공원


공원에 도착하니 내가 상상했던 중국의 공원 풍경 - 어르신들이 태극권을 하고, 바둑을 두는 모습 - 은 없었다. 몇몇 사람들이 가볍게 운동을 하고 계셨지만, 공원의 풍경은 한국의 공원에 더 닮아 있었다.

며칠간 '대만도 중국 분토와 크게 다르지 않다.'라고 단정했던 내 생각이 부끄러워졌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대만의 모습을 몸소 느끼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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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중 공원에서의 아침은 한적하고, 평화로웠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이름 모를 꽃 한 송이를 주워, 반지처럼 끼고 사진을 찍으며 잠시 쉬어갔다.

타이중에 도착했을 때의 추웠던 날씨는 온데간데없고, 봄날 같은 따사로운 햇빛이 가득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꽃과 독특한 나무들의 모습이 내가 정말 대만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줬다.

왠지 오늘도 기분 좋은 하루가 될 것 같다는 행복한 예감이 들었다.





타이중 공원을 나와 타이중 구 기차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타이중 구 기차역을 지나서 타이중 문화창의산업단지로 향했다.

IMG_8636.JPG?type=w773 타이중 구 기차역

우리나라보다 더 일찍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대만은 곳곳에서 그 당시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이 타이중 구 기차역은 일본 통치 시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건물의 모습이 어딘가 낯익어 고개를 갸웃거렸었는데, 나중에 아리산 가이드 량거가 "타이베이에 있는 총독부 건물과 비슷하다"라고 알려주었다.



타이중 문화창의산업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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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중 문화창의산업단지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과거 양조장을 리모델링한 타이중 문화창의산업단지였다.

이곳은 오래된 건물을 현대 미술과 공예품을 전시하는 예술 전시공간으로 전환한 도심 재생 산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내가 머물고 있는 타이중 기차역 근처(중구)는 대표적인 타이중의 구도심이다.

대부분의 건축물들은 모두 낡았고, 오래된 느낌이 가득하다. 늦은 밤에는 대부분의 가게들이 영업하지 않고, 왕래하는 사람들도 없는 전형적인 인구공동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타이중 문화창의산업단지는 이러한 인구공동화 현상을 개선해보고자 하는 도심 재생 산업의 결과물 중 하나이다.


하지만 기대가 컸던 만큼 다소 아쉬움도 있었다.

곳곳이 아직 공사 중이거나, 전시 준비 중이라 조금 어수선했다.




국립대만만화박물관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구글맵을 켰다.


“어딜 가야 하지?”


구글맵을 보니 문화창의산업단지에서 도보 15분 정도를 걸으면 국립대만만화박물관이 있었다.

'대만에도 만화가 유명한가?'

일본이라면 모를까 대만에서 만화라니 그 조합이 오묘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대만에서는 어떤 만화들이 인기가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발걸음은 그곳으로 향했다.


박물관이라고 하니 큰 건물을 생각했는데, 구글맵이 안내한 곳은 거대한 공원이었다.

내가 맞게 온 것인지 다시 한번 구글맵을 확인해 보았다. 이곳이 맞았다.

일본 전통가옥 스타일의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IMG_8679.JPG?type=w773 국립대만만화박물관
IMG_8682.JPG?type=w773 국립대만만화박물관


“여기가 진짜 박물관이라고?”


알고 보니 이곳은 일본 통치 시기, 타이중 형무소 교도관들의 기숙사였던 곳이었다.

그 건물들을 개조해 만화 박물관으로 만든 것이었다.

옛 교도소 기숙사가 만화 전시 공간으로 변신하다니, 타이중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유쾌하고 대범하게 느껴졌다.


안으로 들어가니 대만 만화뿐 아니라, 일본 만화 그리고 한국의 BL만화(!)까지 전시돼 있어 놀랐다.

대만이 개방적인 문화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2023년에 문을 연 이곳은 타이중 새로운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고 한다.

만화에 관심이 없어도 공원처럼 산책하기 좋은 공간이었다.


IMG_8687.JPG?type=w773 국립대만만화박물관
IMG_8704.JPG?type=w773 국립대만만화박물관
IMG_8707.JPG?type=w773 국립대만만화박물관


곳곳에 귀여운 고양이 캐릭터가 있는 것도 좋았고, 주변의 한적한 풍경이 참 좋았다.

국립대만만화박물관도 보았겠다. 이 기세를 몰아서 애니메이션 거리로 향했다.




애니메이션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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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중 애니메이션 거리


애니메이션 거리는 ‘거리’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작은 골목길이었다.

골목길에 벽화로 일본 애니메이션 그림을 그린 것인데, 음… 슬프게도 거의 다 내가 알고 있는 작품들이었다. (이렇게 또 오타쿠의 기질이 발휘되는 건가?)


귀멸의 칼날부터 유유백서, 유희왕까지...

안쪽으로 들어가면 드래곤볼이나 원피스 그림도 그려져 있고, 최근에 핫했던 슬램덩크나 마루코는 아홉 살 그림도 있었다. 비록 구경하는데 10분도 안 걸리는 작은 골목길이라 굳이 여기를 마음먹고 와야 하나. 싶었지만, 일본만화, 그중에서도 소년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와도 좋을 것 같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다시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오전에만 벌써 만보를 넘게 걸었지만, 힘들다기보다 새로운 풍경과 사람들을 마주하는 설렘이 더 컸다.

계획 없이 움직였지만, 그 자유로움이 오히려 내 마음을 가볍게 해 주었다.

오늘도 왠지 기분 좋은 하루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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