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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비

비가 오는 날엔

이슬비 (A Light Drizzle, 2020), 캔버스에 아크릴, 182.8 x 182.8 cm, 현 East West Center (Honolulu, Hawaii) 소장


[네이버 사전]

Drizzle: 1. 보슬보슬 내리다. 2. 보슬비 3. (액체를) 조금 붓다

이슬비: 아주 가늘게 내리는 비. 는개보다 굵고 가랑비보다는 가늘다.


아니, 이슬비인데 왜 영문명엔 Drizzle이 들어가는 것일까? 사실 영어 단어로는 이슬비를 정확하게 번역할 수 없다. 기존에 있는 단어인 Drizzle에 더 수식어를 넣어 보슬보슬 내리지만 아주 엻게 내리는 비의 느낌을 살려주었다. Sparkle 이 있기야 하지만 개인적으로 Sparkle 하면 잔디에 물 뿌릴 때의 생각보다 굵은 입자의 물이 생각나고, Light rain이라고 하기엔 앙금 빠진 팥빵처럼 어딘가 밋밋한 표현 같다.


Drizzle은 지금도 여러 번 돌려보는 애정하는 영화인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중 머랜다 프리슬리가 마이애미에서 뉴욕으로 가는 저녁 비행기가 기상 악화로 취소되자 앤디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그다음 날에 뉴욕에 도착할 수 있도록 비행기 표를 구하라고 하면서 하는 대사인 "Oh, Please. It's just, I don't know, drizzling!"가 생각난다. 머랜다에게는 강풍과 천둥, 번개를 동반한 엄청난 비도 보슬보슬 내리는 비인 듯하다. 제우스도 머랜다의 이 대사를 들으며 적잖이 당황했으리라!


석사 학위 청구전 작품 중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이슬비란 작품은 '상심'을 표현하고 싶었다.


여우비의 설화 중 구름이 눈물을 그치고 시집가는 여우의 행복을 빌어줬다는 구절이 있다. 엉엉 울다 어떻게 갑자기 딱 눈물을 그치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우의 행복을 빌어 줄 수 있을까. 분명히 마음에 큰 멍울이 생긴 구름은 대성통곡을 했을 텐데 눈물도 바로 딱 그치진 못했을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장소에 가서 두 입술을 딱 다물며 속에서 올라오는 눈물을 참아보기도 하고, 깊게 한숨을 쉬어보기도 하고, 조용히 흐느적거려 보기도 했을 것이다. 상심이 큰 구름이 울음을 참아보려 애쓰는 순간에 인간 세상에는 이슬비로 내리는 것이 아닐까. 상심에 젖어있는 구름은 피로한 현대 사회를 살아내는 우리의 모습이 투영된 것 같다.


삶의 무게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 만만치 않게 다가온다. 삶의 쳇바퀴를 돌리는 것이 벅찰 때도 있고 억울할 때도 있고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슬픈 날도 있다. 구름처럼 상심에 빠진 모습을 쉬이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진 않다. 하지만 어떤 이유든 상심에 빠진다는 것은 그만큼 온 마음을 다하여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왔다는 증표이다. 마음에 상심의 이슬비가 내린다면 그 이슬비를 충분히 그리고 온전히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당연하지만 내 마음도 내가 다독여줘야 한다. 그래야만 머랜다 여사처럼 당차게 'Oh, Please. It's just, I don't know, drizzling!"이라고 말하며 다시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나의 그림이 상심에 젖어있는 이들을 다독여줄 수 있길 바라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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