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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눈 오는 날

눈이 오면 난 행복해지지~

하와이에서 처음으로 맞이했던 겨울엔 진짜 겨울이 찾아온 듯 온몸이 으슬으슬 뼛속까지 추웠다. 단순히 추운 것뿐만이 아니라 첫 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고 나서 몸살이 났었다. 삼일 내리 꼼짝도 못 하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세상이 뱅글뱅글 도는 것 같고 입맛도 없었지만 살기 위해 밥시간이 되면 간신히 기숙사 식당에 올라가 끼니를 해결하고 다시 누워있었다. 사계절에 익숙해져 있던 신체리듬이 여름 속의 겨울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과 같이 여행 오는 전 세계의 다양한 바이러스들)과 열대 기후가 만나 하와이에도 독감이 있고, 내가 몸살이라고 생각했던 증상은 사실 하와이 독감이었다. 혹시 하와이에 장기간 체류할 예정이라면 하와이에 있는 약국 혹은 병원에 가서 독감주사 (flu shot)는 꼭 맞는 것이 좋다. '열대 지방에서 독감 걸린다면 얼마나 아프다고?' 싶겠지만, 정말 아프다. 오죽하면 하와이에서 살다가 다른 나라 가면 건강하게 잘 산다는 농담이 있을까?


하와이 독감으로 고생했을 때 눈이라도 밖에 펑펑 내렸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었다. 밖의 날씨는 너무 사랑스러워 '알로하스럽다'라고 혼잣말을 하지만 온몸에 미열이 돌아 하와이의 더위를 내 몸이 견디기가 힘들었다. 에어컨을 켜면 되지 싶겠지만 기숙사엔 에어컨이 없었다. 오로지 선풍기로 더위를 견뎌내야 했다. 눈이 내리지 않는 겨울은 왠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이 섭섭했다. 겨울에 눈 내리는 것을 보는 것 자체도 소소한 일상 중에 마주할 수 있는 큰 행운이었던 것이다. 왜 항상 내 곁에서 없어져야 비로소 없어진 것의 대한 소중함을 깨닫는 것일까?


여우비 (Sun Shower), 154.94 x 120cm, 캔버스에 아크릴

첫겨울 방학이 끝난 후 작업실에 복귀해서 바로 이 그림을 그렸다. 여우비는 하와이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화창한 날에 보슬보슬 내리는 비이다. 보슬보슬 내리는 비의 느낌을 살리기보단 시원하게 펑펑 내리는 눈을 비의 모습에 투영하고 싶었다. 눈과 비 내리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린 후 캔버스에 옮기는 작업을 하다 보니 색의 경계가 많이 허물어졌다. 그리고 이 그림은 여우비 시리즈 중 첫 작품이어서 나에게는 더 의미가 있고 소중한 그림이다.


한국에서 겨울을 보낼 수 있지만, 여전히 눈 내려야 비로소 '진짜' 겨울이 왔음을 느낀다. 겨울에 눈 내리는 게 당연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 속에서 나에게 찾아오는 행운인 것을 알게 된 이상 눈이 내리는 날이면 참 행복하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께도 내가 느꼈던 겨울의 행복을 같이 느끼셨으면 하는 마음에 최근에 내렸던 눈 사진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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