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주관적인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우리 각자가 의미와 가치를 두는 일은 서로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기면서 삶의 가치를 느낍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고요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며, 내면의 탐구를 통해 스스로의 의미를 찾기도 합니다. 직장에서 승진하고 칭찬받는 것이 큰 의미인 사람도 있고, 업적과 성취에는 크게 개의치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표인 사람도 있고, 좋은 관계를 통해 행복을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한 사람도 있습니다. 종교적인 깨달음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이 중요한 사람도 있고, 종교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따라가고 남들의 행동을 모방하려고 노력하다가 그만 자신의 취향, 관심사, 성격, 욕구,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려면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지나쳐서 나 자신이 누군지도 잃어버릴 지경이라면 이것은 우리 각자가 행복을 추구하는데 분명히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영국의 정신분석가인 위니코트(D. W. Winnicott, 1896 ~ 1971)는 이런 상황을 거짓 자기(False self)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쩌다가 스스로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일까요?
더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기일 때,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서 아직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를 한 번 상상해 보겠습니다. 아무래도 기억은 나지 않으실 테니 상상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는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보호되면서 욕구가 자연스럽게 충족되는 환경에서 성장합니다. 추위도 없고 배고픔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편안합니다. 그러나 태어난 이후에는 모든 것이 갑자기 바뀝니다. 세상은 춥고 배고프고 졸리고 짜증이 납니다. 강렬한 결핍의 감각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결핍이 느껴질 때마다 아기는 그것이 자연스럽게 해소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아기의 결핍을 채워주었던 것이 누구일까요? 물론 아기의 부모입니다. 하지만 아기의 감각과 사고 수준으로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아기가 오직 알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어떤 것을 마음깊이 바란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것뿐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부모의 도움은 당연한 것입니다. 부모가 어떤 희생을 하는지 어떤 욕구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합니다. 물론, 아기가 성장할수록 아이는 조금씩은 부모의 마음에 대해 눈치채기도 합니다만, 여전히 아이의 세상은 어른들의 세상과 분리되어 있는 작은 보호공간입니다. 아기가 충분히 성장하기 전까지는요. 이 낙원 안에서 아이는 다른 사람들의 욕구나 사회적 압력은 신경 쓰지 않고 무엇이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들고 만족시키는지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고 느끼고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성장하면서, 아이는 보호공간 안에서 발달한 상상과 행복의 세계를 가지고 객관적 현실과 상호작용해 보게 됩니다. 생각만 해본 것들로 현실에서 탐험해보기도 하고, 현실에서 받은 정보들을 가지고 다시 보호공간 안에서 상상해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놀면서, 다른 사람들과 다른 독특한 특성, 취향, 그리고 의미를 찾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무엇이 ‘나’인지 조금씩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혹시 아이들의 공간이 이해받지 못하고 어른들의 시각이 강요되면 어떨까요? 아이는 생존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기대와 사회적 압력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느낄 것입니다. 아이는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 솔직해질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취향과 시각에 대한 속마음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해 볼 기회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다른 사람들의 시각에만 맞출 겁니다. 마음이 겉과 안으로 갈라지는 거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아이가 방치되고 충분히 보호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보호자 없이 세상에 나갔다가 어린 시절부터 많은 힘든 일을 경험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 과정에서 어른스럽고 조숙해질 수도 있지만 그 모습은 많은 사람들은 안타깝게 합니다. 심리학에 대한 지식이 없다고 하더라도 조숙한 겉모습 아래에는 이해받지 못한 아이다움이 남아있을 거라는 것은 누구나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니까요.
부모가 과하게 아이에게 간섭하고 아이가 충분히 자신을 표현하고 숨을 쉴 수 있을만한 공간을 주지 않은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에게 부모는 세상의 그 자체나 다름없는 거대한 존재입니다. 부모가 뭔가를 아이에게 요구한다는 것은 아이에게는 세상 전체가 요구한다는 느낌일 겁니다. 아이는 부모가 원하는 것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부모는 아이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닙니다. 아이는 부모에 속하지 않은 별개의 존재입니다. 아이의 마음속에도 부모가 다 알 수 없는 자기만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완고하게 자신의 사고방식에 따를 것만을 요구하고 아이가 스스로를 표현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아이는 속마음을 표현하고 즐길 수 없습니다. 역시 마음이 안과 밖으로 갈라집니다.
20세기 초부터 행동주의 심리학이 큰 반향을 얻으면서 보상과 처벌을 통하여 인간 행동을 통제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양육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물론 이런 심리학의 사조는 어느 정도의 의미와 효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고 간단하지 않습니다. 외부의 보상과 처벌만 가지고 빚어진 인간은 무엇이 나인지에 대한 질문을 이해하기 어렵고 모든 욕구와 행동의 원동력을 외부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외부에서 오는 동력이 약해지는 순간 어느 순간 깨닫는 거지요. 나,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걸까? 왜 이러고 있는 걸까?
거짓 자기가 나타나는 경우, 세상을 충분히 체험하고, 자신만의 행복과 만족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그들의 이상을 쫒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감추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역할만을 끊임없이 맡아주는 것은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맞지 않는 옷이고, 마음과 몸을 분리하는 것입니다. 어색하고 부담스러우며 힘든 일입니다.
다음으로 중독의 문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안과 밖으로 갈라져 스스로를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는 답답한 상태에서 살고 있는데, 술이나 마약 같은 중독물질이 들어오는 순간 어떤 것이 느껴질지 상상해 볼 수 있으실까요? 그 순간 우리는 갈라진 두 가지 마음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그동안 마음속 깊이 감춰줘 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속마음이 순식간에 자유롭게 바깥으로 표현되는 경험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 순간이 얼마나 개운하고 시원할지 상상해 볼 수 있으실까요. 그런 경험을 계속하고 싶은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나에게 결국은 좋지 않은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요.
우리의 행복과 의미를 찾아 스스로의 내면세계를 탐구하려면, 다른 사람들의 기대나 사회적 압력에 저항하고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물론, 갑자기 스스로를 바꾸려는 과정은 말처럼 쉽지 않으며 많은 연습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어른 쯤되면 이제 보호공간 없이도 스스로 표현해 보는 것도 어색하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단순히 쉬면서 상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상상을 기반으로 많은 모험과 경험이 필요합니다. 수많은 말과 글이 필요합니다. 내 취향을 모르겠어요. 안 해봤는데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것은 놀이이면서, 동시에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과정입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 ~ 1980)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우리를 근본적이고 뿌리 깊게 거부할 때 비로소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We only become what we are by the radical and deep-seated refusals of that which others have made of us.)”
추신
다른 사람의 욕구를 신경 쓰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전 글 ‘경계혼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